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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다른 시(詩)를 쓰는…동화 같은 섬진강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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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다른 시(詩)를 쓰는…동화 같은 섬진강 길

입력
2018.05.15 18:00
1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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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군 덕치면 천담리 구담마을에서 본 섬진강의 아침. 옅은 안개 사이로 아침햇살이 은은하게 파고들어 한 폭의 담채화 같은 풍경이 연출된다. 임실=최흥수기자
임실군 덕치면 천담리 구담마을에서 본 섬진강의 아침. 옅은 안개 사이로 아침햇살이 은은하게 파고들어 한 폭의 담채화 같은 풍경이 연출된다. 임실=최흥수기자

너무 심심해서 심심할 틈이 없다고 했다. 뒤뜰의 작은 연못만 들여다보고 있어도 시가 넘친다고 했다. 어느 날은 맹꽁이와 무당개구리가 찾아와 알을 낳았고, 지금은 올챙이가 헤엄치는 모습이 너무 예쁘다고 했다. 전북 임실군 덕치면 장암리, 고향 진메마을에 살고 있는 김용택 시인은 섬진강가 생활이 너무 심심해서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다고 했다. 인근 덕치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며 5년마다 한 번씩 타 지역으로 전근을 가야 했을 때와, 은퇴 후 잠시 전주에 머물렀던 시간을 빼면 70 평생을 이곳에서 살았다. 그런데도 단 한 번 지겨운 적이 없었다고 했다.

김용택 시인이 평생을 살아 온 진메마을 집.
김용택 시인이 평생을 살아 온 진메마을 집.
김용택 시인이 마을 앞 섬진강 건너 진메(‘긴 산’의 전라도 방언)를 가리키고 있다.
김용택 시인이 마을 앞 섬진강 건너 진메(‘긴 산’의 전라도 방언)를 가리키고 있다.

심심해서 거짓말처럼 재미있는 섬진강의 일상

어제까지 아무일 없던 목단이 오늘은 풍성한 꽃을 피웠다. 어릴 적 직접 옮겨 심은 마을 앞 느티나무는 매일매일 다르지만 언제나 완성된 모습을 보여 준다. 나무보다 시를 더 잘 쓰는 사람이 어디 있느냐고 되묻는다. 아침이면 새 울음소리가 어마어마하다. 새벽 5시30분경이면 어김없이 요란한 지저귐이 시작되는데, 그제는 5시24분부터 울었다고 일기장에 적었다. 새마다 울음소리가 다 다르고 재미있다. 가만히 들어보면 ‘어쩔라고 어쩔하고’ ‘괜찮혀 괜찮혀’ ‘홀딱 벗고 홀딱 벗고’, 별 지랄을 다 한단다. 날아가는 참새가 얼마나 예쁜지, 노는 모습이 얼마나 귀여운지 모른다. 참새란 놈은 잠시도 지긋이 앉아 있지 않고 빨랫줄처럼 날아가 한번도 제대로 된 사진을 찍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 날갯짓이 재미있어 죽겠다고 했다.

진메마을~천담마을 사이 섬진강 수면에 비친 숲이 실제보다 더 푸르다.
진메마을~천담마을 사이 섬진강 수면에 비친 숲이 실제보다 더 푸르다.
시인은 매일 아침 섬진강을 따라 아랫마을까지 산책한다.
시인은 매일 아침 섬진강을 따라 아랫마을까지 산책한다.

요즘은 오전 6시쯤 집을 나서 천담마을까지 강을 따라 걷는다. 줄잡아 왕복 20리(약 8km), 오가는데 각각 40분이 걸린다. 해가 뜨면 산책길이 정말 좋다. 시인의 눈에는 모든 게 예쁘고 재미있다. “매일 보는 강인데 한번도 똑 같은 적이 없어. 봄 여름 가을 겨울 매일 변하는데 얼마나 재미있어? 안 폈던 꽃이 펴 있으면 또 얼마나 신기해? 무궁무진한 자연이 하는 말을 받아 쓰면 시가 되는 거지.” 가끔은 카메라를 들고 사진도 찍는다. 최근엔 꽃과 함께 돌에 낀 이끼 문양을 열심히 찍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별거 아니다. 그런데도 그게 또 재미있다. “어떨 때는 어린 산이 따라 올 때가 있어. 손잡고 오다 같이 바위 위에 앉아 앞산을 바라 볼 때도 있고, 대화는 안 해도 아름다운 뭔가가 있어. 거짓말 같은데, 그래.”

진메마을 천담마을 구담마을, 영화 같고 동화 같은

“도시 사람들은 뭘 보냐고 그러는데, 자세히 보면 뭔가 보일 거예요.” 그의 말대로 심심함 속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을까? 시인의 고향 진메마을에서 구담마을까지 약 7km 섬진강을 따라 길을 나섰다.

진메마을은 마을에서 강 건너편에 보이는 산 이름에서 따왔다. ‘진메’는 전라도 사투리로 ‘긴 산’이라는 뜻이다. 행정지명이 ‘장암리’인 것도 같은 연유다. 강은 예나 지금이나 그대로지만 마을은 세월을 이겨 내지 못했다. 한때 40여가구가 살던 진메마을엔 지금 15가구 25명 정도가 살고 있다. 노인들만 남았다. 시인은 그때는 사람들이 많아서 자연도 더 풍성해 보였다고 말했다. “마을마다 인정이 넘치고 공동체가 살아 있었는데 지금은 그런 게 사라졌잖아요?” 이대로 가면 머지않아 글 속에서나 보게 될 그 정감을 꼼꼼하게 기록하는 것도 시인의 일상이다. “근처에 4촌 형님들이 사는데 고사리와 취나물을 꺾어 와서 집 앞 돌 위에 얹어 놓고 가. 뒷집 동환이 아저씨가 왔다 갔다 하는 것도 관찰하고.” 이렇게 2년 동안 마을의 일상을 기록한 이야기가 벌써 원고지 1만매에 달한다.

임실 섬진강길은 자전거길로 조성했지만 느릿느릿 차로도 갈 수 있다.
임실 섬진강길은 자전거길로 조성했지만 느릿느릿 차로도 갈 수 있다.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물인지…. 물에 비친 산이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어디가 산이고 어디가 물인지…. 물에 비친 산이 완벽한 대칭을 이룬다.
잔잔한 수면에 비친 숲과 산이 한 편의 시가 된다.
잔잔한 수면에 비친 숲과 산이 한 편의 시가 된다.
바람이 일자 수면 위에 하얀 물보라가 번진다.
바람이 일자 수면 위에 하얀 물보라가 번진다.
진메마을~천담마을 사이 섬진강에서 한 주민이 낚시를 하고 있다.
진메마을~천담마을 사이 섬진강에서 한 주민이 낚시를 하고 있다.

흔히 산책로라고 하면 잘 다져진 흙 길 정도로 생각하지만, 섬진강 길은 아스팔트로 말끔하게 포장했다. 명목은 자전거길이기만, 천천히 차를 몰아도 되는 길이다. 이팝나무와 벚나무를 가로수로 심고 벤치를 놓은 주변엔 연산홍으로 조경을 했는데, 굳이 필요할까 싶다. 오른편 산자락에 병꽃나무, 고추나무, 귀룽나무 등 제 좋을 대로 자란 나무들이 사철 새로운 꽃을 피울 테니 말이다.

진메마을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순한 강물이 작은 보(洑)에 갇혀 호수보다 잔잔하다. 4대강 사업 때문에 보의 개념이 대형 댐을 포함할 정도로 부풀어졌지만, 이곳 보는 말 그대로 물 흐름을 막지 않는 얕은 둑이다. 이른 아침 그 둑에서 한번 쉬어가는 느린 강물이 거울보다 매끄럽다. 물에 비친 산과 하늘이 실제보다 진하고 푸르다. 완벽한 데칼코마니에 어디가 숲이고 어디가 물인지 분간하기 어렵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속으로 왜가리와 백로가 날고, 가장자리에서 헤엄치는 원앙과 오리가 이따금씩 부드러운 파문을 일으킨다. 건듯 스치는 바람에 잔잔한 수면이 하얗게 뒤집어지면, 알 수 없는 뭉클함이 강 위로 번진다.

바위에 새겨 놓은 시를 감상하며 천담마을 가까이 이르면 ‘강변사리마을’이라는 간판이 붙은 현대적 건물이 나타난다. 캠핑 야영장을 운영하는 마을기업이다. ‘강변사리’는 생활한다는 뜻의 접미사 ‘살이’와 주변 4개 행정리(물우리, 일중리, 장암리, 천담리)를 아우른다는 뜻을 함께 담았다. 바로 강과 붙어 있고, 진메마을과 구담마을의 중간지점이어서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좋은 위치다.

새벽 안개에 일출, 구담마을의 아침 풍경이 한 편의 동화 같다.
새벽 안개에 일출, 구담마을의 아침 풍경이 한 편의 동화 같다.
구담마을은 영화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제목 그대로의 풍경이다.
구담마을은 영화 ‘아름다운 시절’이라는 제목 그대로의 풍경이다.
구담마을 언덕에서 내려다 본 섬진강. 건너편은 순창 동계면이다.
구담마을 언덕에서 내려다 본 섬진강. 건너편은 순창 동계면이다.

천담마을을 지나 또 심심하게 강을 따라 내려가면 길은 구담마을까지 연결된다. 마을에 다다르기 전 제법 가파른 언덕에는 매화 밭이 조성돼 있고, 사이사이에 화려하지 않지만 정갈한 펜션이 몇 채 들어 서 있다. 맞은편 산세가 우람하면서도 부드러워 깊은 산골인 듯 아늑하다. 그저 바라만 봐도 좋은데, 봄 가을 아침에는 협곡을 이룬 마을에 안개가 자주 껴 몽환적인 풍경을 빚는다. 파릇파릇한 잡초와 키 큰 나무들이 원근감을 더해 옛날 이발관에 걸려 있던 동화 같은 그림이다. 구담마을은 20년 전 영화 ‘아름다운 시절’을 찍은 곳이다. 6·25전쟁이라는 비극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구담마을은 역설적이게도 그 어떤 영화보다 아름답다.

시인에게 섬진강은 무슨 의미일까? “뭐라 하들 못하겠네, 70 평생을 보고 살았기 때문에 도시 가서도 눈만 감으면 산이 보이고 강이 흘러요. 맨날 다른 시를 쓰는.” 눈을 감으면 더 많은 것이 보인다고 했다. 꿈 같고 시 같은 섬진강의 잔상이 언제까지고 눈 앞에 아른거릴 듯하다.

최흥수기자 choiss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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