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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 배반자와 협잡꾼

입력
2017.01.13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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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신의 아이콘’ 유다는 신학 논쟁만 무성하게 했던 게 아니라, 많은 작가들의 영감이 되고 소재가 되었다. 이름을 알 만한 작가들 가운데 빅토르 위고ㆍ보들레르ㆍ폴 클로델ㆍ니코스 카잔차키스ㆍ마르셀 파뇰ㆍ보르헤스가 유다를 주제로 작품을 썼는데, 우리에게 낯선 작가들의 작품과 연극ㆍ영화 분야까지 망라하면 목록이 꽤 길어진다. 여기에 다양한 인간 유형 가운데 하나의 전형이랄 수 있는 배신자가 등장하는 무수한 작품을 추가한다면, 유다도 하나의 장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박상륭이 1963년에 발표한 단편소설 ‘아겔다마’는 유다가 주인공이다. 이 작품에서 유다는 유대 민족주의자 단체인 열심당(Zealots)의 사주를 받고 예수를 로마 관헌에 넘겼으나, 스승을 배반했다는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굶어 죽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 작품에서는 열심당이 예수를 로마 관헌에게 넘긴 이유가 설명되고 있지 않지만, 백도기의 장편소설 ‘가룟 유다에 대한 증언’(전망사,1979)에는 그 사정이 자세히 나온다. 유대 민족의 독립을 원했던 열심당은 민족 해방에 무심한 예수를 민족 해방 투사로 전향시키기 위한 고육책으로 그를 적의 손에 넘겼던 것이다. 이때 유다는 피안에서 누리게 될 영원한 생명보다 현세의 자유를 구하는 현실주의자다.

피터 스탠퍼드의 ‘예정된 악인, 유다’(미래의 창,2016)는 열심당원설은 물론 유다의 이미지를 간략한 캐리커처로 축소하는 모든 통설을 물리친다. ‘요한복음’에는 나사로의 여동생 마리아가 비싼 향유 300데나리온 어치를 사서 예수의 발을 씻겨주는 것을 본 유다가 귀한 돈을 낭비했다고 불평하는 대목이 나온다. 요한은 유다가 가난한 사람을 생각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라 그가 “도둑이어서 돈자루를 맡아 가지고 있으면서, 거기에 든 것을 훔쳐내곤 하였기 때문이다”라고 썼다. 하지만 향유를 구입하는 데 썼던 돈은 원래부터 공동자금이 아닌 마리아의 사비였으니 유다가 넘볼 수 있는 돈이 아닌 데다가, 더욱 이해되지 않는 것은 열 두 제자 중에 이전에 세금 관리였던 마태를 두고 유다가 자금 관리를 했다는 기술이다. 이런 복선은 돈에 타락한 유다가 은화 30냥에 예수를 팔았다는 대단원을 위해 준비된 수식이다.

또 ‘마가복음’은 대제사장이 보낸 경비병과 로마 병사들에게 예수를 가르쳐주기 위해 유다가 스승에게 입맞춤을 했다고 기록했다. 이 입맞춤은 세월이 흐르면서 가식 행위나 거짓 친절을 비꼬는 ‘유다의 키스’라는 관용구로 쓰이게 되는데, 그토록 널리 알려진 요시찰 인물을 대제사장의 경비원이 몰랐을 리 없다. 기적과 설교로 많은 무리의 추앙을 받았던 예수는 비밀히 활동한 것도 아닌 데다가 유대교 지도층의 지속적인 감시와 도전을 받았으니 내부 고발자의 도움 따위는 필요치 않았다. 이런 극적인 기교 탓에, 유다는 창조된 가상 인물이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예수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그 자신이 죄 없는 희생양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예수가 희생양이 되기 위해서는 배신자가 되어 영원히 지옥의 고초를 당해야 할 또 다른 애꿎은 희생양이 있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수의 열두 제자 가운데 누가 그 임무를 맡았던가. 프랑스 철학자 질 들뢰즈는 ‘디알로그’(동문선,2005)에서 배반이 얼마나 어려운 것인가를 강조하면서 그것을 이렇게 예찬했다. “배반이란 창조하는 것이니까요. 배반자가 되려면 우리는 우리의 정체성, 얼굴을 잃어야 합니다. 사라져야 하고 미지의 것이 되어야 하지요.” 유다가 없었다면 예수의 대속은 불가능했다. 예수와 동격인 유다는 사라져버린 신이다.

들뢰즈는 ‘배반자’가 됨으로서 창조자가 되기를 꿈꾸는 사람은 많지만, 대부분은 배반자가 아닌 ‘협잡꾼’으로 낙착된다고 말한다. 들뢰즈는 여기서 유사어로 충분히 혼용할 수 있는 두 단어를 전혀 다른 반대어로 규정한다. 배반자는 자신이 무(無)가 되는 각오를 택하고, 협잡꾼은 똑같은 배반을 범하면서도 자신의 이익을 저울질하기 때문이다. 대통령 선거가 있는 올해, 우리는 무수한 배반을 보게 될 것이다. 그 가운데 누구는 배반자이고 누구는 협잡꾼이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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