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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3대 시장...옛 활기 없지만 젓갈처럼 곰삭은 근대 유산 감칠맛

입력
2014.10.09 1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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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강 흘러 서해 닿는 내륙 강변도시

곡물ㆍ수산물ㆍ교역품 쌓이고 흩어져 충청 호남 상권의 중심 600년 영화

경부선 등 철도 뚫리며 쇠락길 걷고 금강하구둑 들어서 포구 기능 잃지만

200년 역사 젓갈만은 여전히 명성

일제 쌀 수탈 관문으로 흥하던 시절

읍내에 들어선 근대적 건축물들 고스란히 남아 역사관광으로 새 생명

구한말 상선과 고깃배가 쉴 새 없이 드나들 정도로 교역이 활발했던 강경포구(위쪽 사진)는 현재 공원으로 변신했다. 이곳에서 해마다 젓갈 축제가 열린다. 논산시 제공
구한말 상선과 고깃배가 쉴 새 없이 드나들 정도로 교역이 활발했던 강경포구(위쪽 사진)는 현재 공원으로 변신했다. 이곳에서 해마다 젓갈 축제가 열린다. 논산시 제공

금강을 거슬러온 바람결이 선듯하게 느껴지기 시작한 가을 초입에 충남 논산의 강경을 찾았다. 강경은 조선시대 평양, 대구와 함께 3대 시장으로 꼽혔던 곳이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까지 서해의 수산물과 호남의 곡물, 포목의 교역으로 번성했던 화려한 포구의 옛 영화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인구수 1만1,000명 남짓한 쇠락한 읍내를 에워싼 제방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금강이 있어 그나마 이곳이 예전에 포구가 있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을 뿐이다. 지금은 강경포구의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쇠락해 그저 그런 지방 소읍의 모습이지만 예전 강경의 영화는 상상을 초월했다.

600년 가까이 충청과 호남의 교역 중심지였던 강경의 전설은 조선 세종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세종실록과 승정원일기에 강경ㆍ강경포가 기록된 것을 볼 때 당시에도 이름난 교역 중심지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강경포구가 3대 시장으로 자리를 잡은 건 도시를 휘감아 흐르는 금강이 서해로 연결되는데다 내륙 접근성이 좋은 지리적 조건 때문이다.

하구임에도 수심이 깊어 하루에도 100여척의 고깃배와 상선이 오갔다고 한다. 내륙으로 공주와 부여, 청양, 지금의 세종시가 이어졌고 멀리는 청주, 전주 지방까지 포함하는 넓은 시장을 배후에 두고 있었다.

강경을 중심으로 수 백리 밖 비옥한 평야에서 나오는 온갖 곡물을 실어 날랐고 내륙으로 어물과 소금을 공급하면서 큰 교역 도시로 발달할 수 있었다.

강경포구는 두 번의 전성기를 거치면서 성장했다. 조선 중기부터 서해에서 잡힌 수산물은 절반이상이 이곳을 거쳐갔다고 한다. 제주에서 온 미역과 고구마, 좁쌀을 실은 배가 드나들었다. 중국의 무역선도 비단과 소금, 당시의 공산품 등을 실어 날랐다.

1871년 신미양요 이후 서해안과 중국에서 생산한 소금이 물밀 듯 들어와 이곳에서 전국으로 공급됐다. 운송을 기다리는 소금은 시내 곳곳의 창고에 보관됐고 창고에 들어가지 못해 야적한 소금이 산을 이루었다고 한다.

당시 소금유통은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20여명의 객주가 좌지우지했다. 이들은 수백 명의 등짐꾼과 우마차를 동원해 전국에 소금을 공급했다. 소금으로 막대한 자본을 형성한 객주들은 수산물 도매상을 좌지우지하고 수백 척의 고깃배에 출어자금을 대주고 구전을 받는 대금업까지 발을 넓혔다.

강경포구 객주의 활동이 커지면서 서해의 수산물도 몰려왔다. 조기와 갈치는 전국의 수요를 감당할 정도였다. 민어, 홍어, 게, 전갱이, 새우젓 대부분이 강경을 통해서 공급됐다고 전해진다.

1899년 인근의 군산항이 개항하며 수입화물의 80%가 강경시장을 통해 판매, 출하되면서 수산물, 곡물, 공산품을 아우르는 국제중계항의 역할을 담당했다. 강경과 군산의 지리적 관계는 마치 서울과 인천, 평양과 남포와의 관계와 흡사했다. 이 무렵 명태와 오징어 등 동해에서 잡은 어물집산지인 원산과 함께 전국 2대 포구로 명성을 떨쳤다.

하지만 철로가 뚫리며 상권이 흔들렸다. 1905년 경부선, 1912년 군산선, 1914년 호남선 등이 차례로 개통되며 강경포구의 수운은 운송능력이 수십 배인 철도와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다.

흔들리던 강경의 경제를 떠받친 건 일제의 본격적인 쌀 수탈이었다. 한일합병 이후 일제는 강경과 군산을 가장 먼저 수탈의 관문으로 삼았다. 당시 이곳에 최신식 도정공장을 4개를 짓고 도정한 쌀을 일본으로 보냈다.

돈이 돌고 물류가 커지면서 인구도 급증했다. 한때 인구수가 3만명을 넘었고, 유동인구는 10만명에 달했다. 1924년 일제가 어선과 교역선 보호, 수산물 하역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제방을 쌓고 갑문을 완공한 이후 일본인들이 봇물처럼 몰려왔다. 1897년 단 1명에 불과했던 일본상인은 1,500여명으로 늘어났고 이들의 자본은 강경상권을 거머쥐기 시작했다.

시장은 900여개의 점포가 상시장과 하시장으로 나뉘어 좌판을 펼치며 활기를 더했다. 일본인들은 서창동, 중앙동, 염참동 일대에 근대식 건축물들을 짓고 터를 잡았다. 강경 시가지엔 그들이 지은 관청, 공공건물, 학교, 각종 상점과 금융, 점포병용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섰다. 충남에서 가장 먼저 우체국과 호텔이 문을 열었고, 화력발전소가 건설돼 전기가 공급됐다. 개교 100년에 가까운 강경상고 출신들은 아직도 국내 금융계에서 주요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영원할 것처럼 보였던 강경포구의 영화는 점차 사그라지기 시작했다. 광복 이후 군청이 논산으로 옮겨간데다 한국전쟁이 발발해 연무대에 훈련소가 설립되고, 대전과 익산의 상권이 날로 커지면서 강경시장을 잠식해 들어갔다. 여기에 하구에 토사가 쌓이면서 화물선과 고깃배의 출입이 힘들어지면서 상권을 잃고 말았다.

황복과 뱀장어, 메기 등을 잡던 고깃배 몇 척이 남아 포구의 명맥을 유지했으나 1990년 금강하구둑이 완공되며 이마저 사라져 포구의 기능을 완전 상실했다.

지금의 강경은 소금과 수산물집산지의 전통을 살린 젓갈시장만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서해에서 잡은 각종 생선의 집산지였던 강경은 팔고 남은 물량을 오래 보관하기 위해 염장법과 수산가공법이 발달했다. 200년 가까이 이어온 염장법은 후예들에게 고스란히 이어졌다. 소금창고가 늘어섰던 염천동 일대에는 지금도 140여개의 젓갈도소매상이 젓갈의 전국유통량 50%이상을 공급하고 있다.

성장기를 강경에서 보낸 작가 박범신은 소설 ‘소금’ ‘읍내 떡뱅이’ ‘시진읍’ 등 많은 작품의 배경을 강경으로 하고 있다. 그는 “내 문학의 고향은 논산 강경”이라고 말할 정도로 강경에서의 삶을 작품을 녹여냈다.

1990년대부터 젓갈시장의 부활로 전국의 주부들의 발길이 잦아지면서, 젓갈처럼 곰삭은 구한말과 일제강점기 때 지어진 읍내의 건물들이 관심을 받기 시작했다.

영화세트장처럼 박제가 돼 철거를 기다리던 수많은 건물들은 근대역사문화유산이라는 생명을 얻어 되살아났다. 주민들도 2012년‘강경역사문화원’을 설립하고 문화유산 지키기에 나섰다. 충남도와 논산시도 111억원을 투입, 도시전체를 관광자원화하는 사업에 착수했다.

오랫동안 스산할 정도로 침체됐던 강경이 그 침체 때문에 고스란히 쌓아둘 수 있었던 근대의 문물을 바탕으로 문화역사의 도시로 다시 태어나려는 것이다. 곰삭은 젓갈, 곰삭은 근대의 시간으로 화려했던 강경의 영화를 다시 꽃피우려는 것이다.

논산=이준호기자junhol@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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