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등록 : 2018.06.28 04:40

[정민의 다산독본] “천주학 유행, 좌시할 수 없다”… 원로 학자들로 번진 논쟁 대결

<17> 남인 학맥간의 동요와 균열

등록 : 2018.06.28 04:40

이벽, 당대 논객ㆍ원로 설득 풍문에

성균관 유생 등 적극 추종 나서

젊은층서 서학 공부 급속 유행

남인서도 천주교 파급력 경계령

성호학파 좌장 안정복이 첫 포문

“둘을 꺾어야 이벽 광풍 사라져”

배후지목 원로 이기양ㆍ권철신에

수차례 장문 편지로 천주학 공방

2012년 치러진 탄생 300주년 추모제에 모셔진 순암 안정복 선생 초상. 성호 이익의 제자였던 순암은 역사책 '동사강목'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주변 남인 성리학자들이 겉잡을 수 없이 천주학에 빠져들자 이를 강하게 비판한 인물이기도 했다. 광주시청 제공

“천주학은 유문(儒門)의 별파”

1784년 여름 이래 이벽의 행보는 거침이 없었다. 최고의 논객 이가환이 그의 논리에 무릎을 꿇었고, 그해 9월에는 원로급의 이기양과 권철신 형제마저 이벽에게 설득 당했다는 풍문이 파다했다.성균관 유생 중에서도 재기명민한 젊은 그룹이 그를 적극 추종하고 있었다. 다산은 그들 중의 선두주자였다.

이는 1776년 정조 즉위 이래 서양 과학기술의 수용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명하면서, 젊은 그룹 사이에서 서학 공부가 유행처럼 번져갔던 사정과도 무관치 않다. 36세 때인 1797년에 작성해 올린 ‘동부승지를 사직하며 비방에 대해 변백한 상소(辨謗辭同副承旨疏)’에서 다산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적고 있다.

“신이 서학 책을 얻어 본 것은 대개 20대 초반입니다. 이때 원래 일종의 풍기가 있어, 능히 천문역상(天文曆象)의 주장과 농정수리(農政水利)의 기계, 측량추험(測量推驗)하는 기술에 대해 잘 말하는 자가 있으면 세속에서 서로 전해 해박하다고 지목하곤 하였습니다. 신은 그때 나이가 어렸으므로 가만히 홀로 이것을 사모하였습니다. 하지만 성품이 조급하고 경솔해서 몹시 어렵고 교묘하고 세밀한 내용은 애초에 세세히 탐구할 수가 없어 그 찌꺼기나 그림자도 얻은 바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도리어 사생(死生)의 주장에 얽매이고, 쳐서 이기는 훈계에 귀를 기울이며, 삐딱하고 기이하게 변론을 펼친 글에 현혹되어 유문(儒門)의 별파로만 알았습니다.”

똑똑한 젊은이라면 서양학에 대해 관심을 쏟는 것은 당시의 일반적 추세였다. 임금도 적극 장려하던 일이었다. 그러다 점차 영혼에 대한 주장, 천당과 지옥에 대한 학설, 그리고 ‘칠극’에서 일곱 가지 죄악을 이겨내는 가르침 등을 읽으면서 유학의 별파로 알고 이 공부에 빠져들게 되었다고 변명한 것이다.

“침묵으로 죄악을 면하겠다”

기호 남인 집단 안에서 천주교가 무서운 파급력을 보이자, 남인 내부에서도 이 같은 상황을 심각하게 우려하는 경계경보가 발령되었다. 성호학파의 좌장 격인 안정복(1712-1791)이 처음 포문을 열었다. 당시 73세의 안정복은 양근의 권철신(1736-1801)과는 나이 차이가 24살이나 났다. 둘은 애초에 사제간이었다. 안정복은 아우 권일신(1742-1791)의 장인이기도 했다.

안정복의 문집 '순암집' 가운데 천주교 비판 논문인 '천학고'. 젊은이들 사이에서 서학이 광풍처럼 번져나가는 것에 대한 우려의 뜻에서부터 글을 시작한다. 실학박물관 소장

안정복과 권철신은 전부터 공부에 대한 견해 차이로 소모적인 논쟁을 계속해왔다. 한계를 느낀 권철신은 1772년 안정복에게 편지를 보내 더 이상 학문적 토론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그랬던 권철신이 1784년 11월에 안정복에게 문득 편지를 보내왔는데, 그 가운데 이상한 내용이 있었다.

“지난 날에는 글의 의미에만 얽매이는 바람에 실제로 얻은 것은 하나도 없이 큰 죄만 입었습니다. 혼자 생각해보니 아침 저녁으로 제 허물을 구할 겨를조차 없는데 어찌 감히 다시 글에 대해 논하겠습니까? 이제껏 어리석은 견해로 메모하여 기록한 것들을 한꺼번에 모두 없애버리고, 아직 살아있을 때 오직 침묵으로 스스로를 닦아 큰 악에 빠지지 않는 것이 구경(究竟)의 방법이 될 것입니다.”

이것은 유학을 버리고 천주학으로 전향하겠다는 선언에 가까웠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가?”

안정복은 권철신의 느닷없는 편지가 몹시 낯설었다. 편지 속의 그는 자신이 알던 그 사람이 아닌 듯 했다. 1784년 11월 22일에 다급하게 발송한 안정복의 답장은 이랬다.

“공의 편지를 받았소. 전날의 규모와 크게 다른 데다, 자못 이포새(伊蒲塞)의 기미를 띠고 있었소. 공은 어찌하여 이 같은 말을 하는 게요? 편지에 또 ‘죽기 전에 침묵으로 스스로를 닦아 큰 악에 빠지지 않는 것이 궁극의 방법일 것’이라고 했더군. 이 어찌 달마가 소림사에서 면벽하면서 아침저녁으로 아미타불만을 외워 전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부처님 전에 간절히 빌기를, 천당에서 태어나고 지옥에 떨어짐을 면하고자 하는 뜻과 다르겠는가? 나는 그대가 이 같은 말을 하는 까닭을 참으로 알 수가 없소.”

이포새는 우파새(優婆塞)와 같은 뜻으로 집에서 계율을 수행하는 재가 불자를 가리키는 표현이다. 권철신의 편지는 속세를 초월한 고승의 말투에 가까웠다. 더 이상 유학의 논설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겠다. 단지 침묵하며 그간의 내 잘못을 속죄하겠다. 말끝에 단호한 결심이 묻어났다.

“이벽을 그다지도 아꼈건만”

며칠 뒤 마지못해 쓴 권철신의 답장이 돌아왔다. 상관 말라는 투였다. 안정복은 편지를 받자마자 12월 3일에 권철신에게 다시 편지를 썼다. 이기양이 찾아와 천주교 수양서인 ‘칠극’을 빌려가더라는 영남 선비의 전언을 거론하는 사이에, 안정복의 감정은 차츰 거칠어졌다. 그의 편지를 듬성듬성 건너뛰며 읽는다.

“그 뒤로 여기저기서 양학(洋學)이 크게 일어났는데, 아무개와 아무개가 우두머리이고, 아무개 아무개는 그 다음이며, 그 나머지 좇아서 감화된 자는 몇이나 되는 지도 모른다고 합디다. 이벽이 여러 권의 책을 안고 그대를 찾아갔다고 들었소. 이벽은 내가 평소에 아끼고 중히 여겼는데, 이제 이곳을 지나면서 들르지도 않으니 그 연유를 모르겠구려. 가는 길이 달라 이제 서로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겠소.”

앞 편지까지만 해도 돌려 얘기하던 것을 이제는 내놓고 말했다. 안정복은 이재남(李載南)과 이재적(李載績)에게 ‘칠극’을 빌리고, 유옥경(柳玉卿)에게도 편지를 보내 ‘기인십편(畸人十篇)’과 ‘영언여작(靈言蠡勺)’을 더 빌렸다. 그들과 본격적인 일전을 치르자면 이편에서도 상대의 공부 내용을 알아둘 필요가 있었다. 이들에게 보낸 편지에도 “요즘 듣자니 우리 무리 중에 연소하고 재기가 있는 자들이 모두 양학을 한다는 말이 낭자하여 덮어 가릴 수가 없구려. 그대도 틀림없이 들었을 것이오”라는 내용이 보인다.

“천주가 능히 구해줄 수 있겠는가?”

1784년 12월 14일에 안정복은 다시 권철신에게 세 번째 편지를 썼다. 더 이상은 좌시할 수 없다는 결기를 담은 장문의 편지였다.

“지금 듣자니 아무 아무개의 무리가 서로 약속을 맺어 신학(新學)의 주장을 힘써 익힌다는 말이 낭자하게 오가고 있소. 또 접때 들으니 이기양이 문의(文義)에서 보낸 한글 편지 중에 자기 집안의 두 젊은이가 모두 천주학 공부를 한다고 칭찬해마지 않았다더군. 이 어찌 크게 놀랄만한 일이 아니겠는가? 내가 그 책을 대략 살펴보니 문제가 너무 많고, 책 속의 이야기는 허탄하여 성현을 비방하는 뜻이 한 둘이 아니었네. 일전에 권우사(權于四)가 와서 자다가 서학에 말이 미쳤는데, 그가 이렇게 말하더군. ‘중국에서도 일찍이 서학을 금하여 천 사람 만 사람을 넘게 죽였어도 끝내 금할 수가 없었고, 일본 또한 서학을 금하여 수만 명을 죽였답니다.’ 어찌 우리나라에도 이 같은 일이 없을 줄 알겠소? 설령 일망타진의 계책을 세운다 해도 몸을 망치고 이름을 더럽힌 욕스러움을 받게 되면, 이때 천주가 능히 구해줄 수 있겠소?”

오가는 말이 점차 가팔라지고 있었다. 안정복은 그 사이에 자신이 천주학에 대해 공부해 정리한 ‘천학설문(天學設問)’이 있는데 다음에 보내주겠다며 확전(擴戰)을 예고했다.

반격

이왕에 뽑은 칼이었다. 안정복은 이기양에게도 편지를 썼다. 안정복이 보기에 천주학의 가장 배후에는 권철신과 이기양이 버티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 둘의 뒷배 없이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둘을 꺾어야 이벽의 광풍은 비로소 사그라질 것이었다.

“지난번 권일신이 와서 힘써 천주학을 내게 권하더군. 나는 그저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려니 했었소. 그 뒤 또 편지를 보내 내게 이를 권하면서, 천주학이 참되고 실다워(眞眞實實) 천하의 큰 근본이요 통달한 도리라고 말하는 지경에 이르렀소.”

경기 광주 이택재 전경. 안정복이 공부하며 제자를 키운 곳이다. 안정복은 우리 역사서 '동사강목'의 저자로 유명하지만, 천주교에 빠진 남인들과 거센 논쟁을 볼인 인물이기도 하다.

사위 권일신이 장인을 찾아가 천주학을 함께 믿어보자고 적극 권유하기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때를 고비로 권철신 형제와 이기양 측의 반격도 조금씩 수위가 높아졌다.

다시 해가 바뀌었다. 1785년 2월, 안정복은 이기양에게 한번 더 붓을 들었다.

“지난번 종현(鍾峴)에서 보낸 답장을 보니 앙칼진 말이 많았소. 내 생각에 그대가 내 말을 늙은이의 잠꼬대 같은 소리로 보는 것이 분명하구려. 어이 깊이 허물하겠는가? 다만 지난번 권일신이 들렀다가, 내가 어리석은 견해를 지녀 깨닫기 어려움을 걱정한다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고 갔다네. 이제껏 어둡고 앞뒤 막힌 생각을 종내 깨치지 못하니, 이야 말로 앞서 말한 지옥의 고통을 받는 것에 불과할 것일세 그려.”

권일신은 연거푸 장인을 찾아가 천주교의 논리를 설득하기 위한 적극적 행동에 나서고 있었다. 이번 글에 실린 안정복의 편지들은 문집에는 빠진 것이 더러 있고, 친필 초고인 ‘순암부부고(順菴覆瓿稿)’ 제 10책에 날짜순으로 실려 있다. 권철신과 권일신, 이기양의 당시 편지는 하나도 남은 것이 없다.

정민 한양대 국문과 교수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국일보 페이스북

한국일보 트위터

한국일보닷컴 전체기사 RSS

RSS

한국일보닷컴 모바일 앱 다운받기

앱스토어구글스토어

한국일보닷컴 서비스 전체보기

Go

뉴스 NOW

이전

  • 종합
  • 정치
  • 사회
  • 경제
  • 국제
  • 문화
  • 연예
  • 라이프
  • 스포츠

다음

오늘의 사진

많이 본 뉴스

  • 1
  •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