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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자수와 선처

입력
2015.01.30 1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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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 짓고는 못 산다. 숨을 쉴 수 없었다.” ‘크림빵 아빠’ 뺑소니 사망사건 피의자 허모씨가 29일 자수했다. 만취 상태에서 사고를 내고 달아났던 그는 뒤늦게 수사망이 좁혀오자 아내의 간곡한 설득 끝에 경찰서를 찾았다고 한다. 사건 19일 만이다. 숨진 강씨의 부친은 “자수해서 고맙다”며 오히려 허씨의 앞날을 걱정했다. 임신 7개월 아내를 위해 크림빵을 사 들고 귀가하다 변을 당한 강씨를 애도하며 뺑소니 차량 찾기에 힘을 보태 온 네티즌들은 참척의 고통을 딛고 따뜻한 손길을 내민 부친의 모습에 찬사를 보냈다.

▦ 감동의 드라마는 하루 만에 반전됐다. 허씨가 “사고 당시 사람을 친 줄 몰랐다”고 진술했고, 사고 차량 부품을 구입해 직접 수리하는 등 범행을 은폐하려 했다는 소식이 전해진 뒤였다. “177㎝의 거구가 빵 봉지를 들고 걸어가다 치었는데 사람으로 보겠느냐, 강아지로 보겠느냐.” 부친은 “피의자가 진정으로 반성하고 자수한 것 같지 않다”며 분노했다. 인터넷에선 경찰이 가해 차량을 특정하고 신용카드 조회까지 한 상태였는데 허씨의 출두를 선처 대상인 자수로 볼 수 있느냐는 논란이 이어졌다.

▦ 형법 제52조 1항은 ‘죄를 범한 후 수사책임이 있는 관서에 자수한 때에는 그 형을 감경 또는 면제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 형법을 의용한 구형법에서는 ‘범행 발각 전’ 자수만 인정됐으나 1953년 제정된 형법에선 이런 제한이 삭제됐다. 수배가 떨어진 뒤라도 체포 전 자수했다면 감형 사유가 된다는 얘기다. 물론 자수는 ‘임의적 감경 사유’인 만큼 판사가 자수에 이르게 된 경위 등을 따져 형량에 참작하지 않을 수도 있다. 허씨의 경우도 아직 수사 초기 단계여서 선처 가능성을 점치기에는 이르다.

▦ 강씨 부친은 분노를 토하면서도 “용서할 준비는 다 돼 있다”고 했다. “제발 진정으로 뉘우치고 사과하는 모습을 보이라”는 그의 호소는, 죄를 짓고도 편안히 숨 쉬고 되레 “내가 무슨 잘못을 했냐”고 큰소리지 치는 이들이 넘쳐나는 세상을 돌아보게 한다. 모든 범죄 피해자과 그 가족들이 바라는 것은 진실과 진심 어린 사죄다. 그것 없이 섣불리 용서를 구하거나 “그만 좀 잊으라”고 다그치는 것은 그들의 상처를 더 깊이 헤집는 또 다른 범죄일 뿐이다.

이희정 논설위원 jay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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