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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360°] 1980년대 여성인권 살려낸 ‘조영래의 휴머니즘’

입력
2018.06.02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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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의 피해자 권인숙(오른쪽) 씨와 그의 변호를 맡았던 조영래(왼쪽) 변호사가 국가를 상대로 낸 첫 재판이 1988년 5월 10일 서울민사지법 12호 법정에서 열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6년 부천서 성고문사건의 피해자 권인숙(오른쪽) 씨와 그의 변호를 맡았던 조영래(왼쪽) 변호사가 국가를 상대로 낸 첫 재판이 1988년 5월 10일 서울민사지법 12호 법정에서 열렸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법전을 펼친 지 1년 만에 사법시험의 문턱을 넘었지만, 연수원 문턱을 넘는 데는 장장 11년이 걸렸다. 청년은 변호사가 아닌 피고인으로 들어간 첫 법정에서 내란죄를 뒤집어쓴 채 꼼짝없이 정치범이 됐다. 1년 반은 감방의 수인으로, 6년은 수배자로 살았다. 그렇게 20대를 넘기고 다시 연수원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넷.

“사람을 사람으로 대접하지 않아도 좋다고 한다면, 인간성에 거는 우리의 모든 신뢰와 희망은 대체 어떻게 될 것인가.” 조영래, 1981년 12월 사법연수원에서.

그 후 ‘민중의 변호인’이란 이름으로 살았던 짧은 8년. 조영래는 거악에 텅 빈 구호로 맞서는 대신 그 아래 깔린 ‘사람’의 편에 섰다. 물난리로 길거리에 나앉은 수재민, 연탄공장 옆에 살다 폐병에 걸린 달동네 주민… 그를 거쳐간 의뢰인은 하나같이 남루했다.

언제나 약자들의 편이었던 그의 시선이 자연스레 멈춘 곳은 여성의 삶이었다. 먼지 구덩이 속에서 하루 16시간씩 미싱을 돌리며 오빠나 남동생의 뒷바라지를 했던 소녀들, ‘여성의 정년은 26세’라는 법원의 판결 앞에 좌절한 전화 교환원, 경찰 손에 발가벗겨져 성고문까지 당해야 했던 여대생 권인숙까지. 그는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시대의 속박에 갇혀 무거운 삶을 짊어져야 했던 이들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여성조차 ‘여성인권’이라는 개념이 생소했던 시절, 1세대 인권변호사로 잘 알려진 조영래는 사실 ‘대한민국 1호 여성인권변호사’이기도 했다.

1972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판결공판에서 선고를 받고 있는 피고인 조영래. (맨 오른쪽) 한국일보 자료사진
1972년 서울대생 내란음모사건 판결공판에서 선고를 받고 있는 피고인 조영래. (맨 오른쪽) 한국일보 자료사진

“결혼이 여성의 운명인가” 여성 조기정년제 철폐 소송

“한국 여성은 통상적으로 결혼과 동시에 퇴직한다. 그리고 한국 여성의 평균 결혼 연령은 26세이다. 따라서 손해배상의 산정에 있어서도 25세까지 근무하는 것을 전제로 일실수익을 계산한다.”

1985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하루아침에 직장을 잃을 위기에 처한 전화교환원 이경숙(당시 22) 씨는 가해자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조기정년제’ 판결을 받는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결혼한 여자는 어차피 회사를 그만두니 당신의 정년은 딱 결혼 전까지다’라는 것. 당시 서울민사지법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25세 이후로는 가정주부로 살아갈 터인데, 가정주부는 일정한 수익이 없으므로 도시 일용노동자의 임금에 준하여 일당은 4천원으로 계산한다”고까지 판시한다. 가사노동의 경제적 가치를 ‘최하위 생계유지 노동’ 임금으로 일률적으로 못 박아 버린 것이다.

사법부의 이 같은 판단은 당시 여성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결혼퇴직제를 정당화시킨 사법부는 시대착오적 판결을 즉각 철회하라!” 산발적인 분노가 터져 나오는 가운데, 조용히 사건의 항소심 수임을 자청한 변호사가 있었다. 조영래였다. 이경숙이라는 개인을 넘어 한국 여성 전체의 권익과 직결되는 사건이라고 판단한 그는 수임료도 받지 않았다. 돈 한 푼 되지 않는 재판에 수 십장에 달하는 장문의 의견서와 준비서면을 준비한다. 그를 오래 보아 온 지인이 ‘징그러울 정도’였다는 특유의 완벽주의로 의견서 한 자 한 자를 무겁게 써내려 갔다. 단순히 ‘재판에서 이기기 위함’이 아니라, 비틀린 시대의 통념을 바꾸기 위함이었다. 그는 ‘이 사건의 사회적 영향과 심준한 심리에 대항 요망’이라는 서두로 의견서의 포문을 열었다.

“이 판결의 근저에는 기혼여성의 취업을 백안시하고 가사노동 전념을 미덕으로 보는 전통시대적 남성지배적 편견과, 대등한 사회참여를 통하여 경제적 독립, 인간적 존엄을 획득하고자 하는 다수 여성들의 절실한 염원에 대한 몰이해가 은연중에 자리 잡고 있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습니다.”

단지 지금껏 그래 왔다는 이유만으로, 결혼 이후 직업활동의 자유까지 빼앗겨 버린 여성들을 열렬히 대변한 것이다. ‘남자는 직장, 여자는 가정’이라는 성역할 분리의 신화는 급속히 붕괴되어 가고 있다는 근거와 함께 “결혼퇴직제는 엄연히 위법”이라는 주장까지 밀고 나간다. 변화하고 있는 시대상과 이를 뒷받침할 연구 결과까지 정교하게 엮어낸 의견서는 사실 재판부를 향한 것이 아니라, 당대의 여성과 남성 모두를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행간을 읽기라도 한 듯, 법정엔 시민들이 가득 들어찼다. 결국 1심 판결 이후 근 1년 만인 1986년 3월 4일 서울고등법원은 하급심 판결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원고는 비록 미혼여성이기는 하지만 방일물산주식회사의 정년인 55세까지 근무하다가 퇴직할 수 있다 할 것이다.”

1986년 당시 성고문 추방 기독교대책위원회 소속 23개 개신교 재야단체회원들이 새문안교회 앞에서 집회를 갖고 시위를 벌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1986년 당시 성고문 추방 기독교대책위원회 소속 23개 개신교 재야단체회원들이 새문안교회 앞에서 집회를 갖고 시위를 벌였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권력기관 모두가 그를 범했다” 부천서 성 고문 사건

“이 재판은 거꾸로 된 재판입니다. 여기에 묶여 서서 재판을 받아야 할 것은 이 연약하고 순결무구한 처녀가 아니라 바로 이 처녀에게 인간의 탈을 쓰고서도 차마 상상할 수 없는 추악한 만행을 저지른 문귀동입니다.”

1986년 11월 21일 인천지법 법정은 눈물바다였다. 변론요지를 낭독하는 변호인 조영래도, 수의를 입은 채 피고인석에 앉은 앳된 얼굴의 여대생도, 방청석을 가득 채운 어머니들도 울고 있었다. 그 날, 두 손을 포박당한 채 성고문을 당한 권인숙에게는 끝내 징역 3년이 구형됐다. 정작 그를 범한 문귀동 경장은 일찌감치 불기소 처분을 받은 상태였다.

1985년 봄, 서울대 4학년생이었던 권인숙은 부천의 한 공단에서 주민등록증을 위조해 위장취업을 한 혐의로 경기 부천경찰서에 연행됐다. 당시 운동권 대학생들이 노동현장에 뛰어드는 것은 낯설지 않은 일이었다. 문제는 경찰이 권씨가 체포되기 약 한 달 전쯤 일어난 5ㆍ3 인천사태의 배후 인물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던 것이었다. 권씨에게 수배자 명단을 들이 민 수사관은 그의 가슴을 만지며 “네가 처녀냐?” “가슴을 보니 처녀 같지 않다”고 말하며 수치심을 자극하기에 이른다. 급기야 윗선이 “그런 방법이 효과가 있는 것 같으니 계속 써 보라”는 지시를 내리자, 문귀동은 권씨와 단둘이 남은 조사실 안에서 각종 변태적인 성고문을 자행한다. 수년이 지나고 나온 유죄 판결문에 부분적으로 드러난 범행 사실엔 당시 권씨가 어떤 정신적, 육체적 피해를 당했는지가 자세하게 드러난다.

하지만 권씨를 범한 이가 문귀동뿐이었을까. 경찰은 제 식구를 감싸는 것도 모자라 권씨를 무고로 고소했고, 공안당국은 조용히 덮으라는 지시를 내렸으며, 검찰은 은밀하게 수사결과를 조작했다. 법원마저 명백한 진술들을 끝내 무시한 채 권씨에게만 징역 1년 6개월의 실형을 내렸다. ‘성적 모욕 없었고 폭언 폭행만 했다’(조선일보 86년 7월 17일 자)는 제목으로 헤드라인을 뽑은 언론은 보도지침을 따르는 중이었다. 조영래는 이 모든 조직적 만행에 맞섰다. 감옥에 간 후 “차라리 죽어버리고 싶다”고 말한 권씨를 처음 접견한 그 순간부터였다. ‘변호사는 변론으로 말한다’는 상식을 깨고 법정 밖으로 걸어 나온 그는 손수 고발장을 쓰고 기자회견을 열었으며, 대중적 호소를 위해 김수환 추기경을 직접 찾아갔다. 그의 눈에 부천서 성고문 사건은 단순한 ‘공권력 남용의 결과’가 아니라 ‘여성의 성에 대한 담론’을 근본적으로 뒤집을 수 있는 중대한 사건이었던 것이다.

“권양의 진실은 그 진실을 은폐하기 위하여 허둥대는 권력의 모습에 의하여 한 단계 한 단계 승리의 길로 전진을 거듭했습니다. 진실은 감방에 가두어둘 수가 없습니다.”

며칠밤을 꼬박 새우고 법정에서 개정을 기다리면서도 닳디 닳은 원고를 수십 번 고쳐 적었던 그는 변론 도중 끝내 눈물을 쏟았다. 변론문은 권씨 개인의 고난을 한국 여성 전체의 상처로 확장했다. ‘정신이상자가 아닌 이상 어째서 아무런 반항을 하지 않았느냐’는 국회의원의 저열한 힐난에 대해, ‘어떻게 다 큰 처녀가 자기가 당했다는 사실을 남에게 내세울 수 있느냐’는 기자의 비겁한 편견에 대해 그는 답했다. “누가 더 이상 권양에게 돌을 던질 수 있는지 나서보라고 요구하고 싶습니다. 누가 과연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상투적인 허위조작과 모략을 일삼는 거짓말쟁이인지는 이미 명백히 판명이 났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6월 항쟁이 터져 나왔다. 분위기가 전환되자, 대법원은 1988년 2월 9일 뒤늦게 문귀동에 대한 재정신청을 받아들인다. 사건 발생 3년 만인 1989년 6월, 마침내 문씨는 징역 5년 형을 선고받게 된다. 지난한 투쟁 내내 ‘여성들의 문제는 여성들 스스로 해결하라’던 노동운동 지도부의 방임은 여성들의 자각을 불러일으켰다. 계급 문제와 민족문제가 해결되면 여성 문제도 자연스럽게 해소될 것이라고 믿었던 통념에 금이 가면서 여성운동은 들불처럼 번지기 시작했다. 민주주의 투쟁에 가려져 있던 ‘여성인권’에 대한 담론은 이 사건을 계기로 태동한 것이다. 당시 조영래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원한 것은 양식이 있는 사람, 눈물이 있는 사람, 우리 자녀들의 내일을 걱정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 되는 최소한도의 요구였습니다.”

당연한 인권, 더 나아가 여성인권을 힘주어 말한 그의 변론 전문은 아직도 시대의 명문으로 남아 있다.

명문장가 이기도 했던 조영래 변호사가 남긴 글을 모은 책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1991년 12월 조 변호사의 1주기를 기념하여 출간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명문장가 이기도 했던 조영래 변호사가 남긴 글을 모은 책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 1991년 12월 조 변호사의 1주기를 기념하여 출간됐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그 자신 또한 가부장의 틀을 깨다

“내가 아는 조 변호사는 어떤 사람보다도 가부장적 틀에 매이지 않았던 사람이었습니다. 아직까지도 한국 사회에서 그런 남자를, 나는 조 변호사 말고는 경험한 적이 없어요. ”

조영래는 자신부터 가부장의 틀을 깨려는 사람이었다. 권인숙의 증언에 따르면, 조 변호사는 사회활동을 하는 부인을 대신해 어린 아들을 평일이며 주말 할 것 없이 각종 행사나 모임에 자주 데리고 나타났다. 초등학교에도 입학하기 전이었으니 한창 손이 많이 가는 시기의 꼬마였을 것이다. 아이를 돌보는 일은 전적으로 어머니의 몫으로 여겨지던 시절, 그는 한 손엔 서류가방을 한 손엔 아들의 손을 잡고 다니며 살뜰히 돌보았다. 출세에 대한 야욕이나, 가부장의 권위를 내세우지 않았던 그의 면모는 먼 이국 땅에서 아들에게 보냈던 편지에 고스란히 드러난다.

“일평이에게. 앞의 사진은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이다. 아빠가 어렸을 때는 이 건물이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아빠는 네가 이 건물처럼 높아지기를 바라지는 않아. 세상에서 제일 돈 많은 사람, 제일 유명한 사람, 높은 사람이 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단다. 작으면서도 아름답고 평범하면서도 위대한 건물이 얼마든지 있듯이 –인생도 그런 것이다. 건강하게, 성실하게, 즐겁게, 하루하루 기쁨을 느끼고 또 남에게도 기쁨을 주는 그런 사람이 되기를 바랄 뿐이야.” 1990년 1월 18일 밤 아빠가

조영래 변호사는 1990년 12월 12일 폐암 투병 중 사망했다. 향년 43세.
조영래 변호사는 1990년 12월 12일 폐암 투병 중 사망했다. 향년 43세.

마흔셋의 아까운 나이, 폐암으로 요절한 그의 빈소에서 후배들은 고인을 이렇게 회상했다고 한다. “그가 골몰했던 건 ‘우리 사회는 어떤 체제로 뒤바뀌어야 한다’는 운동 이념이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제약한 구체적인 현실을 어떻게 개선해 나갈 것인가’하는 휴머니즘의 문제였습니다.” 언제나 사람, 더 나아가 약자를 향했던 ‘민중의 변호사’ 조영래. ‘인간답지 못했던 당대 여성’의 삶을 드러낸 시대의 변론들엔 아직까지도 ‘조영래식 휴머니즘’이 살아 숨 쉬고 있다.

박지윤 기자 luce_jyu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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