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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유행어 사전] 놉

입력
2016.03.01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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놉은 영어 nope을 그대로 가져다 쓰는 말이다. nope의 원래 발음에 들어 있는 이중모음을 굳이 억지로 살려서 발음하려고 한다면 ‘노웊’이 되겠지만, no를 그저 ‘노’라고 하듯이 nope도 ‘놉’이라고 한다.

no의 변이형인 nope은 입술을 꾹 다물면서 강조해서 발음하며 그럼으로써 의미도 강조된다. 또, 문법적 기능도 대답할 때뿐이다. 미국식 영어에서 nope은 1880년대 후반에 만들어졌고, 한 해 뒤에 yep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yes의 변이형인 yep도 nope과 마찬가지로 발음으로나 의미로나 강조형이다.

영어 yes와 no, 불어 oui와 non, 독어 ja와 nein은 모두 1음절이다. 영어 no와 독어 nein은 이중모음이지만 어느 나라 말에서든 이중모음은 2음절이 아니라 1음절로 청각에서 지각된다. 시작할 때와 끝날 때의 소리가 다를 뿐이지 매끄럽게 이어지는 것이다.

no에 해당하는 한국어는 보통 ‘아니요’다. ‘아니요’는 3음절이어서 일단 입 밖으로 꺼내기가 ‘예’보다 더 어렵다. 음절수를 기준으로 거칠게 말하자면, 한국어는 거부 의사를 밝히거나 거절하는 게 화자로서는 아주 불리한 언어인 셈이다. ‘예’에 비교한다면, ‘아닙니다’는 더 불리하달 수 있다.

‘아니요’와 서로 바꿔 쓰일 수 있는 ‘안돼요’도 마찬가지다. 이 경우에는 “안돼요 돼요 돼요…”라는 농담도 있다. 거부, 부정 등의 의사표시를 하기 위해 입 밖에 내는 말은 ‘돼요’보다 1음절이 더 많다. ‘아니요’와 ‘안돼요’는 유저-프렌들리 하지 않다.

전통적으로, 대개 한국 사람은 정이 많아서 야박하고 매정하게 거절하거나 거부하는 게 힘들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것은 지금 사라져 가는 추세의 인류학적 특성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많이 남아 있다. 보통이라면 대개 거부, 거절 등을 쉽고 편하게 하지 못한다. 특히나 화자가 마음이 모질지 않고 부드러운 사람이라면 매번 제대로 거절을 못해서 나중에 마음고생을 하기 마련이다.

또 한국어는 경어법 체계가 엄격하기 때문에 존댓말을 쓰면서 거부, 거절한다는 건 심리적으로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이것은 상대가 집안의 어른이나 학교나 직장의 선배나 상사, 거래처의 고객 등이라면 몇 번씩 되풀이해서 겪게 되는 일이다. 그래서 속으로는 당연히 거절하고 싶거나 거부해야 하지만 한국어 관습과 한국의 인류학적 습속 때문에 본의 아니게 ‘네’라든가 ‘예’라고 대답해버리고 마는 일이 한국 사람이라면 드물지 않다.

바로 그런 배경 때문에 ‘놉’이 선호되는 듯하다. 그저 ‘노’라고 하는 것은 아무래도 싸가지가 없게 들린다. 그렇기 때문에 한 번 더 꺾은, 혹은 에두른 표현인 ‘놉’을 쓰는 것일 터이다. ‘아니요’라고 하는 것보다는 ‘놉’이라고 말하고 나면, 단호하면서도 우아하고, 정중하면서도 깔끔하게 거부와 부정의 의사표시를 할 수 있다. ‘놉’은 아직까지는 그다지 불손하거나 퉁명스럽게 들리지 않는다.

물론, 직장 같은 데서 높은 사람에게 ‘놉’이라고 말하는 것은 당연히 아주 불가능하다. 한국에서는, 아래 직원이 임원이나 대표 등에게 반대 의사나 논리를 겸손하게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어디라고 함부로 직답을 하는 거냐?”라며 야단맞는 게 흔하다. 그래서인지, 시중에 나와 있는 처세술 책에서는, 거절을 할 때 예컨대 이렇게 하라고 나와 있다: “(침을 잔뜩 바른 뒤에) 으음… 죄송하지만, 도와드릴 수 없겠는데요.” 대체 이건 뭥미?

제대로 ‘놉’이라고 말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사드? “놉!” 테러방지법? “놉!” 쉬운 해고? “놉!” 헬조선? “놉!” 20세기 중반 미국의 독일계 철학자 마르쿠제는 책 “일차원적 인간”에서 ‘위대한 거부’를 강조했다. 우리는 자본주의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사회에서 순응주의적으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그럴수록 비판적 부정이 필요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놉? “어머, 이건 꼭 써야 돼”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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