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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여기 재떨이는 왜 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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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여기 재떨이는 왜 있지

입력
2018.03.04 19:0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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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휴가를 맞이해 따뜻한 곳으로 떠나기로 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나는 기내의 좁은 길을 지나 화장실로 들어갔다. 일을 보려던 내게 그 자리에 조금 어울리지 않는 물건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재떨이었다. 이 금단의 존재는 15년 전 내가 비행기를 처음 타던 때부터 기내 화장실 벽에서 태연하게 눈에 띄었다. 심지어 위치도 타고 있는 담배에 빨간색 사선이 그어진 금연 안내문 바로 아래였다. 나는 그것을 무심코 한 번 열어보았다. 당연히 내부는 깨끗하게 비어있었다.

뜬금없는 존재기에 그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비행기 내부에서는 누구도 공식적으로 담배를 피울 수 없다. 하지만 재떨이는 모든 화장실 벽에 내장되어 있다. 그렇다면 아무도 이용하지 못할 재떨이는 왜 일부러 만들어져 있을까. 비행기에서 흡연이 허용됐던 옛 시절의 잔재가 아직 남아있는 것일까. 아니면 승객에겐 흡연이 금지되어 있지만, 기장이나 승무원은 긴 비행을 마치면 몰래 일탈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인가. 혹여나 공중도덕상 흡연의 욕구가 없던 사람들도 깨끗하게 준비된 재떨이를 열어보곤, 한 번쯤 허공에서 연기를 내뿜고 검은 재를 터는 상상에 빠져들게 하는, 그러니 아직 없애지 못해 남아서 사람들을 유혹하는 불필요한 존재가 아닐까. 나는 그 공간에서 위화감을 조성하는, 재를 털기 위해 가장 효율적으로 디자인된 모양새를 바라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여행에서 돌아와 나는 그 존재의 이유를 검색해보았다. 곧 납득할만한 구절을 찾을 수 있었다. 비행기 회사의 문건이었다. “공식적으로 비행기 내부에선 절대 흡연이 금지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누구도, 당연히 관계된 어떤 사람이라도 마찬가지입니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기내에서 꼭 흡연을 하고야 맙니다. 계속 기내 금연을 홍보하고, 더 강력한 처벌을 할지라도, 매년 일정 수의 사람들은 흡연으로 적발됩니다. 또한 누군가의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은 강렬해서, 이 위법을 앞으로 원천봉쇄할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기에 재떨이가 없다면, 어차피 존재할 그 사람들은 비행기 화장실에서 벽이나 휴지 같은 곳에 아무렇게나 재를 털거나 비벼 끄고 말 것입니다. 그것은 위생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결국 선량한 사람들에게 피해가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차라리 화장실에 재떨이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랬다. 그것은 비행을 마친 기장을 위한 것도, 뭇사람에게 유혹을 가하기 위한 것도 아니었다. 오롯이 공공질서를 위반하는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어차피 매년 비행기를 이용하는 수많은 승객 중에 흡연자는 나올 것이다. 당연히 용납해서는 안 되고, 정해진 규정으로 엄벌해야겠지만, 비행기를 만드는 사람들은 일단 그 범법자가 미칠 영향까지도 고려해야 했다. 그래서 도저히 불필요해 보이는 재떨이는 모든 기내 화장실 벽에 내장되어 깔끔한 자태를 뽐내게 되었고, 비행기 제작자들은 많은 승객 중 오직 범법자를 위해서만 품을 들여 설계해 공간을 마련하고 재떨이를 배치하게 되었다.

그런데, 세상에 이렇게 범법자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물건이 있을까. 오로지 사회 질서를 파괴하는 사람만이 이용할 수 있고, 또 그들만을 위해 누군가 만들어 놓은 물건이 있을까. 그렇게 비행기의 재떨이는 나같은 범인의 생각보다 더 유별나고 유난한 배려에서 태동한 존재였다. 그래서 나는 자전거도, 자동차도 아닌, 비행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크기만큼의 거대한 아량이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널 정도의 너른 존재를 창조하려면, 누군가를 고려하는 마음도 그 정도의 너비가 되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하고.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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