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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기생충의 추억

입력
2017.11.17 14:52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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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보리밥 숟가락만 들라치면/ 배가 아팠다/ 주린 놈들/ 깡보리밥이라도/ 회를 치며 달라드는지…’. 김순진 시인의 ‘횟배앓이’라는 시의 일부분이다. 1980년대 중반까지 회충 탓에 배가 아픈 횟배앓이는 흔한 질병이었다. 1971년 한국인의 기생충 감염률은 84.3%. 64년 한국기생충박멸협회가 창설돼 퇴치 작업에 나섰지만 좀체 사라지지 않았다. 그러다 70년대 초 간편한 대변검사법이 도입되고 각종 구충제가 보급되면서 감염률이 급격히 떨어졌다. 전국 800만 학생들에게 1년에 두 번 의무적으로 대변검사를 실시한 게 주효했다.

▦ 2012년 한국인의 기생충 감염률은 2.6%로 낮아졌다. 회충 등 장내(腸內) 기생충은 거의 사라졌다. 그래도 붕어 모래무지 등 민물고기 회가 원인인 간디스토마 감염률은 6% 선으로 외국에 비해 여전히 높다. 민물회를 즐기는 사람이 많아서다. 2010년 경북 문경에서 발견된 17세기 여성 미라에선 많은 양의 간디스토마가 나왔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수라상에 향어회를 올렸다는 기록이 있다. 실제 전국 각지에서 미꾸라지회(충청), 잉어회 장어회(경상), 논우렁이회(전라), 가물치회(강원) 등을 즐겼다.

▦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귀순하다가 총상을 입은 북한 병사의 복부에서 수십 마리의 기생충이 발견됐다. 수술을 집도한 아주대병원 이국종 교수는 “외과의사 경력 20년이 넘었지만 한국사람에게서 이렇게 큰 기생충이 나온 적은 없었다”고 했다. 하지만 이 북한 병사가 특이한 경우라고 보기는 어렵다. 통상 탈북자들에게서도 기생충이 많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2015년 대한의사협회 세미나에선 북한의 장내 기생충 감염률이 57.6%로 발표됐다. 북한은 여전히 인분을 비료로 써서 기생충이 만연한 것으로 추정된다.

▦ 기생충박멸협회 후신인 한국건강관리협회는 2000년대 초 북한 기생충 박멸사업에 적극 나섰다. 북한 의사들을 위한 기생충학 책자를 만들어 전달하고 어린이용 구충제 250만명분을 마련해 방북했다. 우리나라는 기생충학 선진국이다. 기생충 박멸에 쓰일 기자재 등 초기 비용 450억원, 이후 매년 100억원의 운영비만 지원해도 5년 뒤 북한의 기생충 감염률을 10%대로 낮출 수 있다고 한다. 북한 병사가 기생충의 추억을 되살렸다. 북한 어린이들이 횟배앓이 없이 행복하게 뛰어놀 날이 빨리 오길 기도해 본다.

고재학 논설위원 goindo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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