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승준 기자

등록 : 2018.04.14 10:00
수정 : 2018.04.14 12:23

'두루마기 흩날리는 아이돌' 상상의 힘으로 무대를 수놓다

스타일리스트 김나연 씨

등록 : 2018.04.14 10:00
수정 : 2018.04.14 12:23

[스태프가 사는 세상] <6> K팝 아이돌 스타일리스트 김나연

# 때ㆍ장소 맞춰 연예인 입을 옷

기성복으로는 소화 어렵고

방송국마다 다른 의상 찾기도

# "스타일링은 무대 그 자체"

작업실엔 수많은 옷들 빼곡

밖에도 10여개 여행가방 가득

김나연 스타일리스트가 최근 서울 강남구에 있는 작업실에서 아이돌 그룹 빅스 멤버인 라비가 지난해 앨범 '도원경' 활동 때 무대에서 입었던 의상과 소품을 들고 제작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아이돌그룹 중 유일하게 최근 열린 방북 공연 ‘봄이 온다’에 참여한 레드벨벳은 자줏빛 계열의

벨벳 소재 옷을 입고 노래 ‘빨간맛’을 불렀다. K팝의 최신 유행을 이끄는 아이돌그룹이 1970~80년대 유행했던 복고풍의 벨벳 의상이라니. 레드벨벳은 첫 방북 공연에서 파격보단 팀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데 주력했다. 레드벨벳이란 팀명엔 강렬한 레드와 부드러운 벨벳처럼 다양한 음악을 선보이겠다는 뜻이 담겼다. 무대 위 화려한 아이돌그룹의 첫인상을 좌지우지하는 것이 바로 의상이다. 벨벳으로 된 옷을 입고 무대에 오르면 생면부지의 북한 관객이라도 의상으로 팀 이름을 한 번 더 떠올릴 가능성도 자연스럽게 커진다.

가수의 공연 의상 콘셉트를 잡거나 때론 가수가 무대에 선보일 옷을 직접 제작하는 스태프, 바로 스타일리스트다. 패션 디자이너와는 크게 두 가지 면에서 다르다. 디자이너가 불특정 다수를 위해 옷을 만든다면, 스타일리스트는 특정 연예인을 대상으로 한다. 디자이너가 옷 제작에만 집중하는 대신 스타일리스는 때와 장소에 맞춰 연예인이 입을 옷까지 직접 챙긴다. 원더걸스의 노래 ‘노바디’ 하면 황금빛 롱드레스가, 소녀시대의 노래 ‘지’하면 총천연색 청바지가 떠오른다. 스타일리스트들의 공이다.

옷으로 둘러 쌓인 성… 작업실 가보니

이들의 작업 공간은 어떨까. 역시 옷에 묻혀 살았다. “아휴 좀 치워야 하는데, 죄송해요.” 지난 4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의 한 빌라 지하 1층. 스타일리스트 김나연(29)씨의 작업실은 옷이 쌓여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김씨와 함께 일하는 동료 스타일리스트가 서둘러 거실에 가득했던 옷을 치우며 모세의 바다처럼 길을 열었다. 김씨는 너무 어수선하고 보여드릴 게 없다며 작업실 공개를 극구 사양했었다. 김씨를 설득해 바로 인터뷰한 ‘덕분에’ 꾸밈 없는 작업 현장을 마주할 수 있었다. 김씨가 옷을 간신히 치우며 만든 길을 따라 2개 방에 들어서니 역시 수많은 옷이 성벽처럼 방을 둘러싸고 있다. ‘목욕’을 하고 주인이 찾아오길 기다리는 옷들이 천정까지 빼곡한 세탁소에 온 기분이라고 할까. 아이돌그룹 빅스의 옷이 대부분이었다. 김씨는 2013년부터 빅스의 스타일리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그의 작업실 밖에는 작은 냉장고만한 크기의 여행 가방 10여 개가 세워져 있었다. 역시 옷들이 주인이었다.

아이돌그룹 빅스의 앨범 ‘도원경’ 콘셉트 이미지. 이들은 한복에 노리개를 찬 뒤 전자음악에 맞춰 춤을 췄다. 젤리피쉬엔터테인먼트 제공

EDM에 춤 추는 ‘꽃선비’ 나오기까지

스타일리스트의 손이 가장 많이 가는 연예인은 단연 아이돌그룹이다. 무대란 특수한 장소에서 춤을 출 때 어울리는 옷, 그것도 단체로 어울리는 의상을 찾기란 쉽지 않다. 기성복으로는 소화가 어려운 조건들이다.

결국 상상의 힘이 필요하다. 김씨는 지난해 큰 ‘산’을 만났다. 스타일링을 맡고 있는 빅스의 소속사인 젤리피쉬엔터테인먼트로부터 팀의 새 앨범 주제가 ‘도원경(桃源境)’이란 말을 듣고는 머릿속이 하얘졌다. 노랫말의 시간은 한참 거꾸로 흘렀다. ‘달에 비친 너를 보고’ ‘밤의 안부에 널 닮은 붉은 동백이 질투해’란 가사엔 고대의 향취가 그득했다. 갓을 쓰고 복숭아 나무 아래 서 있어야 할 기세였다.

김씨는 “빅스 측이 무대 의상으로 동양적인 느낌을 원해” 한복부터 찾기 시작했다. 잡지의 한복 화보를 비롯해 인터넷에서 옛 전통 의상을 샅샅이 뒤졌다. 자료 조사에만 2주가 걸렸다. 김씨는 두루마기를 비밀병기로 택했다. 춤을 출 때 흩날리는 옷으로 시각적인 여운을 살리고 싶어서였다. 동양적인 멋을 강조하기 위해 두루마기 밑에 사군자를 새겼다. 허리춤엔 노리개도 달았다. 소품으로 부채까지 활용했다. 묵직한 전자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꽃선비’. 아이돌그룹으로선 모험이었다.

옷을 정장을 본뜬 개량한복으로 만들어 춤 출 때 움직이기 편하게 했고 현대적인 분위기를 살렸다. 서너 번의 의상 디자인 수정을 거쳐 두 달여 동안 이뤄진 작업이었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두루마기를 걸친 아이돌그룹은 한국을 넘어 일본 등 해외를 누비며 화제를 뿌렸다. 온라인엔 ‘‘도원경’ 의상 제작 대행’ 이란 글까지 올라왔다.

무대마다 새로… 아이돌그룹 의상 제작의 고충

아이돌그룹 무대 의상 제작은 질과 양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하는 작업이다. 아이돌그룹은 무대마다 다른 옷을 입어야 한다. 방송사마다 다른 화면을 이유로 가수 측에 새 무대 의상을 원하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아이돌그룹이 신곡을 내면 일주일에 출연하는 음악프로그램은 지상파 방송 3사(KBSㆍMBCㆍSBS)와 CJ E&M 계열 케이블음악채널 Mnet을 포함해 최소 4개다. 보통 신곡 활동 기간이 4주인 것을 고려하면 최소 16번 음악프로그램에 출연해야 하고, 출연 횟수만큼 다른 옷이 필요하다. 5인조 그룹일 경우 출연 횟수에 멤버 수를 곱하면 한 곡 홍보 활동하는 데 무대 의상만 80벌이 필요한 셈이다.

옷마다 손도 많이 간다. 격렬한 춤을 추다 보면 옷이 찢어지기 일쑤. 상의 팔 부분이 특히 취약해 틈틈이 수선해야 한다. 무대 올라가기 직전 옷이 찢어지면 스타일리스트는 소위 ‘멘붕’이 된다. 김씨는 “아이돌 의상은 옷 보호를 위해 대부분 신축성이 좋은 스판덱스(합성섬유)를 주 소재로 하고 그 위에 다른 옷감을 얹는 식으로 제작한다”고 말했다. 빅스의 ‘도원경’ 한복 의상도 스판덱스로 만든 뒤 겉감을 덧대는 식으로 만들었다.

10년 전 월급 30만 원의 ‘열정페이’

믿고 찾는 스타일리스트가 되기까진 가시밭길이었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10여 년 전만 해도 근무 환경은 열악했다. 김씨가 받은 첫 월급은 30만원. 하루에 3~4시간밖에 자지 못하고 받은 ‘열정 페이’였다. 패션업계 특유의 관행이었다. 김씨는 “첫해엔 230일 동안 하루도 쉬질 못했다”고 했다.

월급이 쥐꼬리만 하다 보니 하루 식비를 3,000원으로 줄였다. 컵라면과 우유로 한 끼를 해치우는 게 대부분이었다. 일을 시작하면 옷 배달이 ‘주업’이다. 선배 스타일리스트가 인맥을 통해 확보한 의상을 매장에서 가져 오고 다시 가져다 주는 일이다. 김씨는 한 번에 큰 가방 3~4개씩을 끌며 버스를 탔다. 옷 배달에 드는 차비를 아끼기 위해서였다. 워낙 무겁다 보니 가슴 주위 통증을 달고 살았다. 찜질방은 제2의 숙소였다. 연예인의 일정에 맞춰 일하다 보니 새벽에 일이 끝나면 찜질방 신세를 져야 했다. 김씨의 집은 인천. 할증이 붙는 시간에 서울에서 집까지 택시를 타면 5만원이 나와 엄두를 내지 못했다.

김씨는 ‘코디때기’란 말이 제일 싫었다. 꾸미는 사람이란 뜻의 ‘코디네이터(coordinator)’에 때기란 비하적 단어를 붙여 스타일리스트 직업 자체를 깔아뭉개려는 시선을 접하며 마음에 생채기도 여러 번 났다. 10년 전만해도 스타일리스트는 제대로 대접 받지 못했다. 스타일리스트 업무 자체를 생산적인 일로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김씨는 다른 분야의 수 많은 인턴들처럼 “내일은 나아지겠지”란 생각으로 이를 악 물고 버텼다.

김씨는 처음엔 배우 스타일리스트로 시작했다. “옷으로 더 많은 걸 표현하고 싶은 바람”에서 가수 스타일리스트로 눈을 돌렸다. K팝에서 아이돌 스타일링의 중요성이 강해질수록 그의 사명감도 커졌다. 김씨는 “내게 스타일링은 무대 그 자체”라고 표현했다. 의상 등 시각적인 요소들이 무대 일부이기 때문이다. 김씨가 건넨 명함 한 면엔 ‘Stylist(스타일스트)’란 단어가 크게 적혀 있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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