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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실연 당하지 않고 피는 청춘이 어디 있으랴

입력
2017.08.13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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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을 잃었을 때 큰 아이는, 잘 먹지도 못하고 잘 자지도 못하며 실연의 병을 심하게 앓았다. 지켜 보는 내 마음도 편치 않았다. ‘일주일 가면 지금보다 괜찮아지고 한 달이 가면 좀 더 괜찮아질 거야’ 위로했더니 아이는 ‘시간이 왜 이렇게 안 가요?’ 하고 물었다. ‘너랑 잘 안 맞는 것 같다고 했잖아’ 했더니, ‘왜 자꾸 좋았던 기억만 나요?’라는 혼잣말 같은 대답… ‘안 먹었는데 왜 배가 안 고파요?’ 하기에, ‘다른 곳이 많이 아파서 배고픔을 못 느끼는 거야’라고 얘기했다.

마음이 마음대로 되지 않던 나의 스무 살이 겹쳐 떠올랐다. 그래 아프겠지, 실컷 아파한 뒤에는 툭툭 털고 일어나 새로운 사랑을 만나렴. 곧 새로운 사랑이 찾아올 거라는 말은 입 밖에 내지 않고 마음 속으로만 했다. 사랑 때문에 아픈 청춘이 애틋하면서도, 속세에 찌든 엄마는 아이가 밥벌이 때문에 아픈 게 아니라 다행이고, 서른 살이 아닌 스물 둘 실연에 딱 적당한 나이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몇 해 뒤 어느 날, 지하철 막차 시간이 지나도 들어오지 않는 둘째가 걱정 되어 전화를 했다. 아이는 늦은 귀가를 미안해 하기는커녕 무슨 독립운동이라도 하다가 방해 받은 것처럼 화를 냈다. 아이의 항변은 ‘저 오늘 헤어졌단 말예요!’였다. 그러고는 한밤중에 들어와서 한참이나 넋두리를 했다. ‘정말 억울해요,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요? 진짜 마음을 다해 사랑했는데…’ 큰 아이 때보다는 나도 충격이 덜해서 ‘다른 친구 만나면 되지 헤어졌다고 뭘 이렇게 유난을 떨어? 속 다 버리겠다’하며 가볍게 대꾸했다. 그랬더니 아이는 ‘이제 다시는 사랑 안 할 거예요’ 라는 지키지도 못할 다짐을 비장하게 했다.

실연 당한 남자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실연의 의미를 한 줄 카피로 통찰한 광고가 있다. 일본 아사히의 한 음료 TVCM인데, 광고의 분위기는 심각하지 않고 코믹하다. 실연을 당해 고개를 푹 숙인 채 한숨을 쉬는 남자에게 만화 캐릭터 같은 가발을 쓴 어린 꼬맹이 둘이 실연을 더 당해 보라고 소리 지른다, 자신의 슬픔을 알아야 다른 이의 슬픔도 알 수 있다고.

남자) 휴우…

아이1) 왜 그러는데요?

남자) 실연 당했어.

아이2) 그럼 좀 더 실연 당해 보세요!

남자) (의아해 하는 표정)에?

아이1) 자신의 슬픔을 알아야 처음으로 다른 이의 슬픔도 알 수 있잖아요.

아이2) 원래 그런 거예요.

남자) (수긍하며)네!

(아사히_세븐컬러워터_TVCM_2014_카피)

페트병에 든 가벼운 음료 광고에 저토록 심오한 카피를 얹다니, 참 재기 발랄하다. 약간 과장하면 우리는 실연으로 인해 슬픔도 인생의 한 부분이라는 것을 절절하게 체험하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실연의 상처를 이겨내면서 슬픔을 받아 들이고 청춘의 다음 단계로 나아간다. 나아가 남의 슬픔에 진심으로 공감하는 능력을 얻기도 한다.

“엄마, 저 지금 좀 나가야 되겠어요.”

“밤 열 한 시에 왜?”

“저랑 친한 선배가 여자 친구랑 헤어졌는데 많이 힘들대요. 택시비 줄 테니 기숙사로 좀 와 달래요.”

“며칠 전에도 그 형 위로해 준다고 새벽까지 술 마시다 오지 않았어?”

“맞아요. 형이 오늘 여자 친구 또 만나서 성격 고치겠다고 계속 만나자고 설득했는데 잘 안 됐대요.”

둘째는 오늘도 실연 당한 선배의 부름에 밤늦게 뛰어나갔다. 군대 간 친구가 휴가 나왔을 때 그리고 친구나 선후배가 실연을 당했을 때, 막내는 시간과 장소를 불문하고 무조건 쫓아 나간다. 그 두 경우는 세계 3차 대전 버금가게 심각한 일이어서, 당장 달려가 그 엄중함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그렇게 청년들은 오늘도 서로의 슬픔을 헤아리고 위로하는 중차대한 일을 하고 있다. 실연이 먼 나라 이야기가 된 엄마는 ‘모여서 공부를 그리 하면 고시에도 붙겠다’는 잔소리를 삼키고 아드님이 아침에 먹을 북어국을 끓인다.

(아사히_세븐컬러워터_TVCM_2014_스토리보드)

(아사히_세븐컬러워터_TVCM_2014_유튜브링크)

정이숙 카피라이터ㆍ(주)프랜티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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