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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는 과연 페미니즘만의 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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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례는 과연 페미니즘만의 문제일까

입력
2016.07.22 2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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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별이 같다는 이유로 서양의 페미니즘이 아프리카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는 없다. 일본 페미니스트 오카 마리는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에서 제1세계 페미니즘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게티이미지뱅크
성별이 같다는 이유로 서양의 페미니즘이 아프리카 여성들의 목소리를 대변할 수는 없다. 일본 페미니스트 오카 마리는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에서 제1세계 페미니즘의 폭력성을 고발한다. 게티이미지뱅크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

오카 마리 지음ㆍ이재봉, 사이키 가쓰히로 옮김

현암사 발행ㆍ340쪽ㆍ1만6,000원

서구ㆍ일본 제1세계 페미니즘

선정적 장면에는 ‘야만’ 딱지

제3세계 구조적 착위엔 침묵

“가해자적 위치 잊었다” 비판

1997년 9월 일본의 전쟁책임자료센터가 주최한 심포지엄 ‘내셔널리즘과 종군위안부 문제’에서 재일조선인 서경식 당시 도쿄대 경제학 교수와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는 책으로 최근 국내에서도 유명해진 우에노 치즈코 도쿄대 명예교수가 맞붙었다. “위안부는 식민지 지배의 문제’라는 서경식의 말에 우에노는 “위안부는 국경을 넘어선 성폭력 피해, 즉 페미니즘의 문제”라고 맞받은 것이다. 위안부 문제는 일본이 한국을 짓밟은 사건일까, 남성이 여성을 유린한 사건일까. 이 문장들 사이엔 무슨 차이가 있을까. 오카 마리 교토대 인간환경학연구과 교수에 따르면 명백한 차이가 있다.

오카는 ‘그녀의 진정한 이름은 무엇인가’에서 제1세계 페미니즘이 제3세계 페미니즘을 대하는 태도의 이면을 분석한다. 보통 1세계는 서구권, 3세계는 아시아와 아프리카 지역을 지칭하는 단어지만, 이 책에서 1세계는 선진기술을 바탕으로 경제력을 구축한 강대국, 3세계는 그들의 자원 착취 대상인 약소국을 가리킨다. 오카는 일본을 1세계로 규정한다.

서양 페미니즘의 대표적 성과로 꼽히는 것 중 하나는 아프리카 여성의 할례 의식을 고발한 것이다.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행해진 여성 할례는 성년을 맞은 여성의 음핵, 소음순, 대음순 등 성기 외부를 절제하거나 꿰매는 시술을 말한다. 이 ‘유례 없이 잔학무도한’ 전통은 서구뿐 아니라 전세계를 놀라게 했고 미국과 유럽의 페미니스트들이 할례 폐지를 외쳤을 때 이에 반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저자는, 그러나 할례를 반대하는 이들이 어째서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구조적 착취에 관해서는 아무 말이 없는지를 묻는다. 이 수상한 침묵은 이집트 여성들이 스스로 입을 열어 지금 우리에게 중요한 건 할례뿐만이 아니라 식량 문제와 주거 문제, 영유아 사망, 문맹 등이라고 말해도 바뀌지 않는다. 저자는 이를 명백한 사실 “횡령”이라고 부른다. 서양 페미니즘이 아프리카 여성들의 고통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골라 쓴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가장 경계하는 타자화를 스스로 범하는 셈이다.

음핵이 잘려나가는 마당에 그깟 타자화가 뭐 그리 대단하냐는 의견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할례라는 지극히 선정적인 장면에 주의를 집중시킴으로써 3세계에 야만의 이미지를 뒤집어 씌우는 일은 식민시대 강대국들의 침략 사전 작업과 정확히 일치한다. 저자는 서양의 페미니즘이 여성 할례 비판을 통해 “아프리카와 아랍의 전통에 대한 차별과 노골적인 인종주의, 아프리카와 아랍 세계에 대한 서양의 경제적 착취와 정치적 지배 사실을 은폐하려”고 한다며 사실상 “페미니즘으로 위장한 식민지주의”라고 비판한다.

다시 서경식과 우에노의 설전으로 돌아가, 저자는 우에노의 발언에 가해자로서의 자기 인식이 결여돼 있다고 비난한다. 피해자를 향해 눈물 짓는 이타적 행동이 자기도 모르게 피해자와 자신을 동일시함으로써 스스로의 가해자적 위치를 잊게 만든다는 저자의 비판은 예리하다. 그는 우에노를 비롯한 1세계 페미니스트들을 향해 페미니즘 뒤에 숨어 제국주의의 문제, 지금도 모습을 바꿔 행해지는 식민지 착취를 은폐하지 말라고 비판한다.

타자에 대한 연민이 아무리 크더라도 타자 자신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그 타자가 나처럼 생각하고 각성할 수 있는 존재라는 사실도 자주 잊는다. 그 폭력성은 ‘미개한’ 타자가 스스로 입을 열 때 본색을 드러낸다. 자신이 그린 연민과 다른 그림이 나오면 못들은 척 하거나 가치절하하는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를 뜨겁게 달군 여혐 논란도 마찬가지다. 좋게 말하면 들어줄 텐데 너무 공격적으로 나오니 논의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는 불평이 나온다. 그러나 1세계가 기뻐할 3세계의 목소리는 없고, 남자들을 불편하지 않게 만드는 페미니즘은 없다. 타자를 이해할 수 있다는 안이한 믿음에 일침을 가하는 저자의 공격적인 겸손함이 긴 울림으로 남는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여성의 할례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소녀와 여자'. 영화 스틸 컷
여성의 할례를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소녀와 여자'. 영화 스틸 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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