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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 전쟁 상처, 길어올려야 치유도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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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속 전쟁 상처, 길어올려야 치유도 가능

입력
2015.04.08 15: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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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에 피해 입은 베트남전 현장… 위령-증오비 등 찍어 국내서 사진전

"참전용사들도 전쟁 피해자… 아픔 이야기하면 훨씬 편해져요"

베트남전 학살 생존자 응우옌떤런과 응우옌티탄이 8일 서울 견지동 평화박물관에서 이재갑(가운데) 작가 좌우에 함께 서서 '하나의 전쟁, 두개의 기억' 전시 테이프를 끊고 있다.
베트남전 학살 생존자 응우옌떤런과 응우옌티탄이 8일 서울 견지동 평화박물관에서 이재갑(가운데) 작가 좌우에 함께 서서 '하나의 전쟁, 두개의 기억' 전시 테이프를 끊고 있다.

“여기가 우리 마을 사람들이 학살당한 장소예요. 나는 (사진에 찍힌)이 장소 옆에 엎드려 있었는데, 정신을 차려 보니 시체가 가득했어요.”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 피해자 응우옌떤런(64)은 8일 서울 견지동 평화박물관에서 개막한 사진작가 이재갑의 ‘하나의 전쟁, 두 개의 기억’ 사진전에서 걸린 사진 한 장을 가리키며 이렇게 말했다. 그가 살던 안빈 마을이 속한 빈딘성 따이빈사(社)는 ‘빈안 학살’로 1,004명이 숨진 지역이다.

응우옌떤런은 1966년 2월 13일 새벽 일어난 끔찍한 사건을 증언했다. 그의 어머니와 여동생을 비롯한 25가구가 한 자리에 모여 수류탄과 총알 세례를 받았다. 당시 15세였던 그는 큰 부상을 입었고 지금도 수류탄 파편을 몸에서 제거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응우옌떤런과 함께 한국을 방문한 피해자 응우옌티탄(55)은 꽝남성 퐁니 마을에서 왔다. 1968년 그가 8살 때 마을 주민 74명이 한국군 청룡부대에 희생됐다. 그 중에는 응우옌티탄의 가족 다섯 명도 포함돼 있었다. 퐁니 마을 입구 당산나무 아래에는 한국과 베트남 청년들이 함께 세운 위령비가 있다. 이재갑은 이 위령비를 둘러싼 풍경도 사진에 담았다. 응우옌티탄은 “마을 풍경이 아름답지만 위령비 내용을 더 자세히 볼 수 있는 사진도 있었다면 좋았겠다”고 아쉬워했다.

이재갑이 베트남전 학살 피해자에 관심을 두게 된 것은 2008년 베트남을 여행하면서부터다. 그는 베트남 곳곳에 있는 민간인 학살 위령비를 찍었다. 안빈과 퐁니 마을은 물론 ‘하늘에 닿을 죄악 만 대를 기억하리라’고 쓴 빈호아 마을의 ‘한국군 증오비’도 찍었다. 학살을 증언하는 마을 사람들의 얼굴도 사진에 담았다. 그는 “베트남 말은 알아듣지 못하지만 눈빛을 보고 목소리를 들으면 그 한이 얼마나 쌓였는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이재갑은 역사문제를 소재로 사진을 찍는 작가다. 한국전쟁 당시 경북 경산 코발트광산에서 벌어진 민간인 학살과 일제강점기 일본으로 끌려간 강제징용 피해 현장을 추적해 촬영하고 조사한 내용을 책으로 엮어낸 적도 있다. 이번 전시도 그런 작업의 연장이다. 이재갑은 “한국에도 민간인 학살 피해자들이 있기에 베트남과 아픔을 공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전시장 입구를 경산 코발트광산 속 동굴처럼 꾸민 것도 그 때문이다. “베트남 학살 피해자들은 제대로 매장이라도 됐지만 광산에 묻힌 3,500여명의 피해자들은 아직도 그 자리에서 꺼내지도 못한 채 묻혀 있습니다.”

이재갑은 “내가 찍는 것은 전쟁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이라고 말했다. 사람이 남긴 마음의 상처에는 반드시 치유가 필요하다. 이재갑은 치유의 방법으로 사진을 선택했다. “전쟁으로 인해 남은 상처의 기억을 끌어내는 매개체가 사진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사진을 찍고 그 분들이 아팠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점점 더 나아지게 됩니다.” 응우옌떤런이 그의 말을 받았다. “말하지 않아도 당신(작가)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픔을 이야기하는 것이 담아두는 것보다 훨씬 편안해집니다.”

이번 사진전은 당초 7일 저녁 서울 견지동 조계사 내 한국불교역사문화기념관 국제회의장에서 개막 리셉션을 가질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달 초 ‘대한민국 월남전 참전자회’ ‘대한민국 고엽제 전우회’ 등 베트남전 참전 군인단체들이 조계종에 행사 대관을 취소하라고 압박하자 조계종이 “안전상의 문제”로 대관을 취소해 버리는 바람에 일정이 하루 늦춰졌다. 월남전 참전자회는 회원들에게 “좌경화된 반국가적인 일부 세력들이 민간인 학살 피해자의 증언이라는 근거도, 증거도 없는 연극을 자행하려 한다. 인생 단축할 각오로 그들의 음모를 분쇄하겠다”고 공지했다고 한다.

이재갑은 참전용사들 역시 전쟁의 피해자라 생각한다고 했다. ‘두 개의 기억’이란 제목도 베트남전을 ‘학살’로 기억하는 베트남인과 ‘참전’으로 기억하는 한국 참전용사들의 처지를 두루 고려한 것이다. “그 사람들도 군인이기 이전에 사람이고, 어떤 부분에서는 피해자니까요. 베트남에서 오신 분들도 이해해주시리라 믿습니다.”

두 피해자와 함께 전시장을 방문한 후인응옥번(53) 베트남 호치민시 전쟁증적박물관장은 “어려운 이야기를 한 작가의 용기에 찬사를 보낸다”며 “전쟁에 참여한 병사들이 용서를 구하는 것이 결국 그들의 마음을 구하는 길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응우옌떤런도 “참전 군인들이 그렇게 화가 난 것은 결국 자신의 마음에 맺힌 말을 하지 못해서일 것”이라고 말했다. 전시는 5월 7일까지. (02)735-5811

인현우기자 inhyw@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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