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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축복을 잃어버린 자, '은유'를 통해 구원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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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각의 축복을 잃어버린 자, '은유'를 통해 구원되다

입력
2015.11.05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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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편소설 '개인적 기억'을 펴낸 윤이형 소설가. 은행나무 제공
중편소설 '개인적 기억'을 펴낸 윤이형 소설가. 은행나무 제공

이런 증상을 보이는 사람이 있다고 상상해 보자. “가깝게는 몇 달이나 1년쯤 전의 일, 멀게는 내게 언어라는 것이 없던 까마득한 옛날의 일까지, 온갖 기억이 순서도 규칙도 없이 터져 나왔다. 엄마와 간 백화점 시식코너에 서 있던 아주머니의 얼굴과 옷차림, 할아버지의 검은색 차를 타고 교외의 음식점에 식사하러 갔을 때 강물 위를 떠가던 오리들의 깃털과 그것들이 헤엄침에 따라 갈라지던 물결의 모양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구체적으로 떠올랐다.”

윤이형의 ‘개인적 기억’은 이렇게 경험한 모든 순간을 다 기억하는 사람의 이야기다. 그의 이름은 지율이다. 물론 이 인물의 선조는 작가도 밝히고 있듯 보르헤스의 ‘기억의 천재 푸네스’에 등장하는 바로 그 푸네스다. 그런 의미에서 ‘개인적 기억’은 푸네스의 후일담쯤 되겠다.

푸네스가 죽지 않고 살았다면, 혹은 푸네스가 한국의 근미래에 다시 태어난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저 완벽한 기억력은 그에게 축복일까 저주일까? 우선은 저주다. 왜냐하면 프로이트식 구분에 따를 때 ‘전의식’과 ‘무의식’의 영역이 없어서 모든 경험을 ‘의식’하는 인물은 망각의 축복을 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삶은 대체로 불필요하거나 고통스러운 경험의 망각에 기초해 있다. 경험한 사건의 경중과 나날의 삶의 필요에 따라 기억은 선택되고 배제되어야 한다. 기억이 아니라, 실은 망각이 삶을 유지시켜준다고 해도 과언은 아닌 셈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능력을 결여한 자에게 세계는 매 순간 특이하고도 무한한 사건들이 무질서하게 발생하는 기억들의 카오스에 다름 아닐 것이다.

궁금해지는 것은 작가가 이 기억의 지옥으로부터 자신의 인물 지율을 어떻게 구원하는가 하는 점이다. 은유를 통해서다. 은유는 물론 지율이 사랑하게 된 여자의 이름이지만, 글자 그대로 메타포로 읽어도 무방해 보인다. 여자 은유는 잘 망각하는 사람이다. 그리고 수사법으로서의 메타포는 어떤 지각 이미지를 다른 관념에 대한 비유로 만들어 그것에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이다. 그렇게 지율에게 ‘의미 있는’ 여자가 생겼다. 그러자 지율은 이제 자신에게 일어나는 그 무한한 지각 경험들 중 의미 있는 것들 위주로 기억을 재구성하는 법을 터득하기 시작한다. 여자 은유는 망각의 은유이기도 했던 셈이다. 은유라는 중심이 생기자, 그 주위에서 기억들의 카오스는 코스모스가 된다. 물론 우리는 우리 안에서 종종 일어나곤 하는 이런 사태의 다른 이름을 안다. 그것은 나 아닌 자에 대한 관심, 곧 ‘사랑’이다.

한국에서 가장 출중한 SF 작가이자 인류라는 종의 원거리 관찰자이기도 했던 윤이형의 소설 세계가 이즈음 경험적 현실과 섬세한 내면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는 얘기들을 듣는다. ‘개인적 기억’은 그 이행의 정확한 방향을 다소간 짐작케 한다. 타인에 대한 공감의 능력만이 이 거대하고도 무의미한 사건과 정보들의 카오스에서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고 작가는 말하는 듯하다. 그 전언에 기대를 건다. 김형중ㆍ문학평론가

◆작가 약력

1976년 서울에서 태어나 2005년 중앙신인문학상으로 등단했다. 소설집 ‘셋을 위한 왈츠’, ‘큰 늑대 파랑’이 있다. 단편 ‘루카’로 제5회 문지문학상을 수상했다. 중편 ‘개인적 기억’은 과잉기억증후군에 걸린 남자를 통해 개인적 기억의 의미와 가치를 묻는 소설이다.

윤이형 작가의 중편 '개인적 기억'
윤이형 작가의 중편 '개인적 기억'

책 속 한 문장

나는 그녀를 사랑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모든 불필요한 과거를 망각이라는 순리에 맡기고, 본래 그것들이 가야 했던 곳에 돌려놓고 싶었다. (…) 그렇지만 이 모든 소망들은 얼마나 오만한가. 얼마나 절박하고, 얼마나 진실이며, 또한 얼마나 허위에 가득 차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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