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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을 놈의 세상 씻금 받고 원도 한도 없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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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썩을 놈의 세상 씻금 받고 원도 한도 없이 가자”

입력
2017.01.02 1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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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첫 선을 보인 굿극 ‘씻금’은 30스튜디오 개막작으로 개작하며 세월호 영혼들을 위무하는 내용을 추가했다. 5월에 다시 선보인다. 연희단거리패 제공
2010년 첫 선을 보인 굿극 ‘씻금’은 30스튜디오 개막작으로 개작하며 세월호 영혼들을 위무하는 내용을 추가했다. 5월에 다시 선보인다. 연희단거리패 제공

“인자 왔는갑다. 진도 앞바다에서 못 찾은 사람들 이제 오는 갑다” “어서와 어서와서 씻금 받고 같이 가입시더.” “아이고 이 썩을 놈의 세상 다 같이 씻금 받고 원도 한도 없이 가자 언제가 여기도 살만한 세상이 되겄제.”

실성한 진도(珍島) 할매, 순례의 씻김굿 마지막 장면에서 배 한 척이 들어오자 객석이 술렁인다. 씻김굿의 상징인 이승에서 저승으로 떠나는 배에는 희한하게 9명이 타있다. 순례처럼 진도 앞바다에서 한(恨) 많은 생을 마감한 세월호 실종자들의 인형이다. 망자를 천도하는 길닦음 소리가 시작되자 객석 여기저기서 울음이 터져 나온다.

“불쌍하신 금일 망재/ 그 다리 건너 새왕을 가시오/ 제불 제보살 제불 제보살이야(…) 불쌍하신 금일 망자/ 씻끔받고 새왕가세(…)새왕을 가시요 극락을 가세”

지난달 31일 막을 내린 극단 연희단거리패의 굿극 ‘씻금’은 “이 시대 연극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우리 식으로 보인”(이윤택) 무대였다. 굿극은 판소리와 연극을 합친 창극처럼, 굿과 연극을 합친 공연 형식. 진도 씻김굿을 무대화한 ‘씻금’은 순례할머니가 이승에서 풀지 못한 원망과 한(恨)을 극으로 전개하는 한편, 그 한을 풀기 위한 굿판이 동시에 벌어진다.

실성한 듯 바닷가를 배회하던 순례가 “나 간다”는 말 한마디를 남기고 물속으로 뛰어들며 이야기가 시작된다. 조용하던 마을은 순례의 죽음에 들썩이며 망자를 위한 굿판을 벌이고, 당골(무당)의 소리에 따라 바닷가 바위 위로 기어오른 순례의 넋은 씻김굿이 자신을 위한 것 인줄 모른 채 굿판을 기웃거리다 이승의 고단했던 편린들을 하나씩 풀어낸다.

“요새는 노래도 아무데서나 못혀 국악원에 가서 하던지 방송국 노래자랑에 나가서 부르래(…) 아 참 피곤한 세상이 되어 부럿어.” 마당극에서처럼 세태를 풍자하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쏟아진다. 당골의 육자배기, 흥타령을 듣는 재미도 쏠쏠하다. 순례 할머니의 한풀이에 다른 망자들의 사연이 얹어지고, 개인의 한은 식민시대의 궁핍과 일본군 위안부, 해방 정국 이데올로기, IMF, 급기야 진도 앞바다에서 아직 건져 올리지 못한 세월호의 넋까지 한국 근현대사의 수난사로 연결된다.

‘씻금’을 만든 이윤택 예술감독(극ㆍ연출)은 오랜 기간 ‘굿의 연극화’를 시도해 왔다. 동해안 별신굿 중 거리굿 장면에서 영감을 얻은 ‘오구-죽음의 형식’, 경기 도당굿을 총체극으로 한 ‘일식’, 제주도 칠머리 당굿을 소재로 한 ‘초혼’ 등이 대표작으로 꼽힌다. 2010년 초연한 ‘씻금’은 연희단거리패가 작금의 현실을 반영해 일부 내용을 수정했다.

이윤택 감독은 공연 후 한국일보와 만나 “새로 문을 연 ‘30스튜디오’의 터 기운이 워낙 세다. 개막 시리즈 마지막 작품으로 ‘씻금’을 생각했던 이유 중 하나”라며 “다시 막 올리면서, 진도 팽목항 앞바다에서 아직 건져 올리지 못한 아홉 명의 넋들도 함께 건져서 씻금과 길 닦음의 굿을 해 주어야겠다는 생각했다. 굿이 단순한 개인사적 한풀이가 아니라 역사적 풀이와 화해의 공간으로 확장되는, 감동과 성찰의 순간을 기대했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혜화동 로터리 근처의 게릴라극장에서 종로구 명륜3가 뒷골목길 ‘30스튜디오’로 터전을 옮긴 연희단거리패는 ‘씻금’을 마지막으로 개막퍼레이드를 마쳤다. 금ㆍ토ㆍ일에만 공연을 올리는 이 곳에서 올해는 기획전 ‘굿과 연극’을 개최해 ‘오구’(4월14~30일), ‘초혼’(5월 4~21일), ‘씻금’(5월 24일~6월 4일)을 차례로 다시 선보인다. 1899-4368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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