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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석학 칼럼] 포퓰리즘의 지정학

입력
2017.01.01 14: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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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아시아 국가들에게 가장 어려운 문제는 도널드 트럼프의 미국 대선 승리와 영국의 유럽연합(EU) 탈퇴를 결정한 브렉시트 국민투표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하는 것이다. 불행히도 지정학적 변화에 맞춰져야 할 초점이 엉뚱한 데 가 있다.

초점이 향하는 곳은 대부분 경제 담론이다. 세계화가 삶을 전반적으로 향상시켰을진 몰라도 노동자와 산업을 혼란에 빠뜨리고 소득 불평등을 더욱 심화시켰으며 트럼프와 브렉시트를 지지하는 근심 많은 유권자들을 낳았다는 이야기가 힘을 얻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주장도 있다. 세계화보다는 첨단기술의 발전이 선진국의 정치적 분열을 초래하면서 경제적 불평등을 악화시켰다는 것이다.

어떤 경우든 신흥국가의 정책담당자들은 불평등을 중요한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각국 담당자들은 세계화와 첨단기술이 중산층과 노동자 계층의 일자리를 빼앗지 않고 트럼프 당선과 영국의 EU 탈퇴 같은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사회적 유동성을 확대시키는 데 뜻을 모으고 있다. 아시아 국가들에게 정책 처방은 분명하다. 가난한 사람들을 보살피고 일자리를 빼앗긴 노동자들에게 재교육과 새로운 고용의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가난한 시민들을 보살피고 사회적 유동성을 최대한 확대시키는 한편 진취적인 기업 활동에 보상을 하고 국민이 자신의 삶을 증진시킬 수 있도록 자극하는 건 당연히 모든 사회가 해야 하는 일이다. 하지만 그러한 정책들에 초점을 맞춘다고 해서 포퓰리즘 정치인들의 급부상의 이면에 자리하는 대중의 불만까지 해소되는 건 아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불평등이 아니라 지배력을 잃어버렸다는 느낌이기 때문이다.

국가들이 자국 내 소득과 부의 격차를 줄이고 모든 시민들에게 사회적 유동성을 보장한다 하더라도 지금 세계 곳곳에서 대중의 불만을 야기하는 요인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미국을 보자. 불평등이 문제의 핵심이라는 논리에서 전형적인 주인공은 교육 수준이 낮고 일자리를 잃은 나이 많은 백인 남성 노동자 계층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런 유권자들이 트럼프를 미국 대통령으로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집단이 실제로 선거 결과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출구 조사에 따르면 백인 남성 대졸자의 53%가 트럼프를 찍었다. 백인 여성의 52%가 트럼프를 선택한 반면 43%만이 힐러리 클린턴에게 투표했다. 18~19세 백인 중 47%가 트럼프를 찍었는데 클린턴을 찍은 사람은 43%에 불과했다. 백인 대졸자 전체 중에선 48%가 트럼프에게, 45%가 클린턴에게 표를 던졌다. 트럼프 지지자들과 경제 담론의 정형화된 생각이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연간 수입이 5만달러 미만인 미국인 36% 중 절반 이상이 클린턴을 찍었다. 나머지 64%의 투표자 중에서는 49%가 트럼프를, 47%가 클린턴을 찍었다. 가난한 사람들이 좀 더 클린턴에게 우호적이었고 부자들이 트럼프를 좀 더 지지한 셈이다. 흔히 알려진 분석과 달리 트럼프의 대선 승리는 경제적 지위에서 떨어져나가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 덕이 아니었다.

EU의 귀찮은 조항과 과도한 회비가 영국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다면서 EU 탈퇴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브렉시트 투표 결과에서도 비슷한 분석이 나온다. 브렉시트 주장은 경제적 불평등, 경제적 배제와 싸워야 한다는 의제와 연결되지 않았다. 부유한 사업가가 영국의 EU 탈퇴를 적극 지지했다는 것은 흥미로운 사실을 보여준다.

더구나 브렉시트를 이끌었던 서민들의 감정은 소득 불평등이나 1%의 부자들에 관한 것이 아니었다. 소외된 빈곤층 유권자들은 자신들의 분노를 부자들이 아닌 다른 소외된 빈곤층, 특히 이민자들에게 쏟아냈다. 런던시는 브렉시트 국민투표 이전 6주에 비해 이후 6주간 증오범죄가 64% 늘었다고 밝혔다. 브렉시트를 주장하는 이들 중에 소득 불평등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일부 있었을진 몰라도 가장 중요한 주제는 아니었다.

트럼프ㆍ브렉시트 지지자들을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것은 세계화의 혜택에서 배제되는 데 대한 분노가 아니다. 자신의 운명을 더 이상 제어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불편함의 공감대다. 소득 불평등 확대가 이러한 스트레스를 가중시켰을 수 있지만 다른 요인들도 그랬을 것이다. 소득이 많든 적든 왜 모든 이들이 불안을 경험하는지를 이것이 설명해준다. 실제로 동유럽의 많은 사람들이 2차 세계대전 후 가혹한 사회주의 체제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제어할 수 없다는 것을 느꼈다. 많은 중국인들이 문화혁명 기간에 느꼈던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런 사회에선 소득 불평등이 눈에 띌 만큼 크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브렉시트ㆍ트럼프 지지자들은 전반적 불평등이 실제로 줄어들었기 때문에 세계화의 영향을 느꼈을 것이다. 신흥경제국가에서 수억명의 사람들을 가난에서 구한 것이야말로 세계화의 가장 큰 효과다. 1990년대 내내 신흥국가들의 국내총생산 총액(시장 환율 기준)은 가까스로 주요 7개국(G7) 국내총생산 총액의 3분의 1 정도에 불과했지만 2016년에 이르자 그 차이는 거의 없어졌다.

국제적 소득 불평등 수준이 낮아지면서 세계 질서에 전례 없는 스트레스를 주고 있다. 서구 국가들이 줄 수 있는 것과 신흥 국가들이 요구하는 것 사이의 격차는 점점 커지고 있다. 세계를 움직이게 하던 미국과 영국의 힘은 약해지고 있다. 지배력을 잃고 있다는 느낌은 이러한 나라들의 정치 엘리트들이나 평범한 시민들이 똑같이 느끼고 있다.

트럼프와 브렉시트를 지지하던 정치인들은 유권자들에게 미국과 영국이 급변하는 세계 질서에서 다시 주도권을 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질 것이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신흥경제국가의 지정학적 상승과 함께 (특히 아시아에서) 세계 질서는 새로운 평형상태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또는 세계적 불안정성이 계속 지속될 수도 있다. 소득의 격차를 줄이는 것은 빈곤층을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선진국에선 그렇게 한다 해도 빈곤층의 불안을 경감시키지 못할 것이다.

키쇼어 마부바니 싱가포르국립대 리콴유공공정책대학원장

대니 콰 싱가포르국립대 리콴유공공정책대학원 경제학 교수

번역=고경석기자 ⓒProject Syndic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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