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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방관, 헌신의 DNA] 소방관들 휴가 못가고, 트라우마 겪고, 파손까지 사비로 변상

입력
2017.10.21 04:40
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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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3명 중 1명 외상후 스트레스 고통

1인당 평균 트라우마 6.4건 경험

정신질환 유병률 국민 평균 10배

상담원 부족한데 추경예산 절반 깎여

#2

2012~2016년 부상자 1725명

장애 입어도 현장출동 인사발령

업무 중 발생한 국민 재산 피해

2년간 20건 1700여만원 부담

경기도 한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김성중(가명) 소방관은 2005년 소방관이 되고 처음 출동한 화재진압 현장에서 얻은 트라우마가 아직도 남아 있다. 붕괴된 단독주택 안에 사람이 있다고 했다. “무너진 건물을 보자마자 달려가서 무릎 꿇고 손으로 벽돌이고 흙이고 정신 없이 파헤쳤어요. 그러다가 뭐가 손끝에 툭 하고 걸리더라고요. 그 느낌을 잊을 수가 없어요.” 잔해 사이에서 그의 손에 걸린 것은 사망자의 손이었다.

화재를 진압하고 응급구조를 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이랴마는 대한민국 소방관이 처한 근무환경은 열악하기 짝이 없다. 순직 사고가 나면 반짝 관심이 집중돼 제도가 개선되는 가 하다가 다시 정체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일상적인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휴가도 못 가는 소방관들이 화재진압 중 어쩌다 발생한 물품 파손 피해까지 제 돈으로 물어낸다.

“눈치 보여 트라우마 치료받나요”

소방관에게 트라우마는 직업을 갖고 있는 한 끊임없이 발생하고, 평생 안고 가는 일이다. 2017년 국립정신건강센터 불안스트레스과 심민영 박사팀이 소방관 21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일시적 우울 불안 등 외상 후 스트레스 증상(PTSS)을 호소한 소방관이 3분의 1에 달했다. 소방관 한 명이 평균 6.36건의 트라우마를 경험했다. 경험자 중 끔찍한 장면 목격 등으로 인한 간접 트라우마를 겪은 경우가 92%, 업무 중 부상 등으로 인한 직접 트라우마 70.8%, 동료의 사망이나 자살 등과 관련된 트라우마가 56.6%였다.

김성중 소방관은 “시신을 한 달에 2번 정도 봐요. 1년이면 20번이 넘어요. 10년이면 200번입니다. 그게 남아 있어서 자다가도 생각이 나고, 현장에서 맡았던 냄새가 잊혀지지가 않아요”라고 말했다.

소방관이 겪는 정신질환 유병률은 일반인의 10배에 달한다. 홍철호 바른정당 의원실이 소방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전국 소방관 심리평가 조사결과’에 따르면 외상 후 스트레스 증후군(PTSD)으로 판정받은 비율은 6.3%로 국민 평균(0.6%)의 10배에 달한다. 우울증(10.8%)은 일반인(2.4%)의 4배, 수면장애(21.9%)는 일반인(6%)의 3배나 많았다. 알코올 의존증도 소방관이 21.1%로 일반인(3.2%)의 7배에 가깝다.

지난달 22일 발생한 강서구 등촌동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들. 강서소방서 제공
지난달 22일 발생한 강서구 등촌동에서 발생한 화재 현장에 출동한 소방관들. 강서소방서 제공

소방관의 정신과 치료 상담 건수는 2012년 484건에서 2016년 5,087건으로 4년 새 10배나 급증했다. 하지만 일선에선 치료를 꺼리는 분위기가 여전하다. 얼마 전 사망자가 발생한 교통사고 현장에 출동했었던 이모(31) 소방관은 “상담을 받기 위해 자리를 비우는 것도 미안하지만, 선배들도 다 경험한 일인데 나약하게 보일 것 같아 치료받기가 꺼려진다”고 털어놓았다. 공하성 경일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정신과 상담을 안 받으면 팀에 불이익을 주는 식으로 치료를 의무화하는 제도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2015년부터 소방청은 PTSD 진단을 위해 ‘찾아가는 상담실’을 운영하고 있다. 전문가가 소방서로 찾아와 상담을 통해 PTSD 고위험군으로 판정되면 치료로 연계하는 것이다. 하지만 제한된 예산으로 지난해에는 전국 213개 소방서 중 14%인 30개소만 방문했고, 올해 89곳을 찾아가는 식으로 더디게 운영되고 있다. 더욱이 1~3회 상담으로 PTSD 판정이 어렵다는 지적도 나온다. 상담 전문가로 활동 중인 소방관 김재형(가명)씨는 “소방관 스스로 트라우마가 얼마나 심각한지 자각하지 못하기 쉬운데, 1~3회 상담 후 상담을 종료하는 식으로는 진단과 치료로 이어지기 어렵다”고 말했다. 올해 7월 국회에서는 찾아가는 상담실 추경 예산이 21억8,000만원에서 10억9,000만원으로 감액된 채 통과됐다.

지난 8일 새벽에 발생한 송파구 가락동 아파트 화재 진압 현장. 송파소방서 소속 소방관이 화재 아파트 내 마지막 잔불까지 소화하고 있다. 송파소방서 제공
지난 8일 새벽에 발생한 송파구 가락동 아파트 화재 진압 현장. 송파소방서 소속 소방관이 화재 아파트 내 마지막 잔불까지 소화하고 있다. 송파소방서 제공

“관심과 지원은 다쳤을 때뿐”

신체 부상 역시 소방관의 일상사다. 화재진압 등 소방 공무 중 입은 부상은 매년 증가 추세다. 김영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지난 9월 소방청으로부터 제출받은 ‘최근 5년간 소방공무원 순직 및 공상 현황’에 따르면 2012년 285명이었던 공상자(부상자)는 2016년 448명까지 증가했다. 2012~2016년 부상자 총 1,725명 중 구급활동(419명ㆍ24.2%)과 화재진압(350명ㆍ20.2%) 중 입은 부상이 많았고, 교육훈련 181명(10.4%), 구조 174명(10%), 기타 601명(34.8%)이었다.

심각한 부상을 당한 소방관은 공무원연금공단의 공상 절차를 거쳐 치료비를 전액 지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중한 장애가 남은 소방관에 대한 배려는 부족하다. 현장출동이 불가능할 정도의 부상ㆍ장애를 입은 소방관에게 적합한 업무를 주고 적응할 수 있게 돕는 제도가 없어 이들은 박탈감과 소외감에 시달린다. 일부는 퇴직해 국가유공자 신청을 하고 일부는 소방관으로 남지만 남은 이들이 어떤 일을 할 수 있을지는 순전히 개인의 몫이다.

10년 전 사고로 장애를 갖게 된 김승주(가명) 소방관은 “부상을 당했을 때는 주변에서 관심을 보여 주었다. 하지만 치료를 받고 복귀해서 현장출동 업무로 인사발령을 받고는 아연실색했다. 내가 어떤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 알려주는 사람도, 담당하는 부서도 없었다. 장애 이후 소방관으로서의 삶은 오로지 나 혼자 감당하고 개척해야 했다”고 한탄했다. 실제로 소방청과 일선 소방서에는 단 한 명의 직원이 부상ㆍ장애 관리부터 직원 복지, 통계 관리, 보안 관리 등 행정업무를 두루 맡고 있다. 제진수 숭실사이버대 소방방재학과 교수는 “소방관에 대한 꾸준하고 지속적인 건강 추적 관리, 부상 후 재기할 수 있도록 돕는 제도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사람 부족한데… 휴가 못 가요”

소방관 인력과 예산 부족은 고질적인 문제다. 소방기본법과 관련 규칙은 행정단위 별 인구와 면적에 따라 소방서와 119구조대를 설치하도록 하고, 펌프차 물탱크차 사다리차 구급차 등 기능별 팀원 수를 정해 놓고 있다. 이를 기준으로 하면 우리나라엔 5만1,714명의 소방관이 필요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근무하는 인원은 3만2,460명(2016년 말 기준ㆍ내근직 제외)에 불과하다. 1만9,254명이 부족한 것이다. 인구 1,000명당 소방관 0.8명 꼴로, 미국(1.1명), 일본(1.3명)에 비해 매우 적은 수준이다.

그러니 소방관 근무환경은 스스로의 건강도 지키지 못할 정도다. “부상으로 치료를 받으러 가도, 휴가를 가도 팀원들에게 미안하죠. 한 명만 일이 생기면 다른 팀원들이 못 쉬어요. 미안한 정도면 다행이에요. 지역에 따라선 24시간씩 2교대 근무를 하는 곳도 있으니까요.” 경기지역 소방서 119상황실에서 근무하는 조진서(가명) 소방관은 “동료가 상을 당하거나 부상을 당해 오래 쉬어야 하는 일이 생기면 낮근무-밤근무-휴일로 3개조 교대하던 근무를 24시간씩 2개조 교대로 바꾸기도 한다”고 말했다.

이런 현실은 2009년 소방관 건강보호 등의 이유로 2교대를 3교대로 바꾸면서도 인력은 충원하지 않아 조별 근무인원은 더 줄어든 탓에 생겨났다. 전국 237개 119구조대는 법정 최소 인력이 26명이지만 실제로는 12명이 근무하는 곳도 있고, 4명씩 3교대 근무를 하는 이런 곳에선 1~2명만 빠져도 근무 자체가 힘들어진다. 인구가 희박해 119안전센터를 설치하지 못하고 단 한 명의 소방관을 두는 1인 지역대도 전국에 30곳이나 된다.

소방관 인력 충원은 올해 새 정부가 들어서며 갑작스레 속도를 냈다. 문재인 대통령의 공약에 따라 소방청은 상반기 2,080명을 채용한 데 이어 하반기에도 1,500명을 추가 채용했고 2022년까지 2만 명을 증원해 법정 기준을 충족시킬 계획이다. 근무환경이 대폭 개선될 것으로 기대되지만 갑작스러운 증원으로 이번엔 교육기관이 신규 소방관 교육을 감당하지 못하는 문제가 불거지고 있다. 소방청은 6개월이던 소방 구급 입문교육을 3개월로 줄였다. 증원될 2만명 교육에 필요한 전문 강사, 건물, 차량 및 장비 등은 아직 계획이 마련돼 있지 않다.

지난 8일 새벽 4시 화재가 발생한 서울 송파구 가락동의 한 아파트에 출동한 소방관들이 자욱한 연기 속에서 잔불을 확인하고 있다. 송파소방서 제공
지난 8일 새벽 4시 화재가 발생한 서울 송파구 가락동의 한 아파트에 출동한 소방관들이 자욱한 연기 속에서 잔불을 확인하고 있다. 송파소방서 제공

“보험절차 복잡해 사비로 변상합니다”

“작년에 집 안에 사람이 다쳐 구조해 달라는 신고를 받고 출동했습니다. 문을 강제로 개방했는데 알고 보니까 신고 내용이 잘못됐던 거예요. 결국 뜯은 문은 출동 나간 대원들이 돈을 모아서 배상했습니다. 다른 소방서에서는 화재진압 차량이 이동하다가 건물 지붕을 파손한 적이 있는데, 보험 처리를 하려다 해명에 지쳐 대원들이 그냥 갹출해 배상한 적도 있어요.”

소방 업무 중 일어난 국민 재산 피해는 시ㆍ도가 가입한 배상책임 보험으로 보상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소방관들이 불도 끄고 돈도 물어낸다. 서울시내 소방서에서 근무하는 소방관 이신직(가명)씨는 “피해를 야기한 사실이 보고돼 인사상 불이익을 받을까 봐 꺼려지고 보험처리 과정이 복잡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보험이 있어도 30만원 이하 금액은 대상에서 제외돼 있고, 7개 시도(서울, 경북, 경남, 울산, 창원, 전남, 충북)는 화재진압 시 발생한 물품 파손은 아예 보험처리가 안 된다. 보험처리를 하려면 소방서 행정부서에 사고경위서를 제출하고 보험을 신청하면 보험사 심사를 거쳐야 하는데, 개인 과실이 없다는 것을 입증하기 어려울 때가 있다. 이런 이유로 보험사가 지급을 거부하면 시ㆍ도의 예비비로 지원받아야 하는데, 도리어 개인 과실에 대한 징계를 받을까 봐 소방관들이 피하고 있다.

소방청이 2015년부터 올 6월 말까지 소방 관련 공무 중 발생한 파손 피해 등을 사비로 변상한 사례를 조사한 결과 총 20건, 1,732만3,000원이 소방관 주머니에서 나왔다. 잠금장치, 방화문, 창문파손이 6건, 차량피해 보상이 5건 등이다. 지난해 8월 전남 화순소방서 소방관들은 염소 농장에 있는 벌집을 제거하려 토치를 사용했다가 건초더미에 불이 옮겨 붙어 산불이 나는 바람에 동료들이 갹출해 1,000만원을 배상하기도 했다. 이런 일이 흔하다 보니 파손 줄이는 법을 따로 돈 들여 배우는 일까지 생겼다. 특수구조대 예하 구조팀에서 근무하는 박승훈(가명) 소방관은 “팀 내 한 선배는 문을 상처 없이 여는 법을 외부 전문가에게 배워왔다”고 말했다.

윤관석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지난해 공무 중 발생한 사고나 물적 손실에 대해 소방대원의 민·형사상 책임을 면제해주는 내용을 담은 소방법 개정안을 발의했지만, 국회 안전행정위원회에 계류 중이다.

박재현 기자 remak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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