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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 “광장의 촛불이 아나키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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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익 감독 “광장의 촛불이 아나키스트다”

입력
2017.06.20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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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동주’에 이어 ‘박열’에서 일제 강점기를 조명한 이준익 감독은 “‘동주’는 바위를 뚫는 식물적 신념을 얘기한다면 ‘박열’은 동물적 신념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차이를 설명했다. 최지이 인턴기자
영화 ‘동주’에 이어 ‘박열’에서 일제 강점기를 조명한 이준익 감독은 “‘동주’는 바위를 뚫는 식물적 신념을 얘기한다면 ‘박열’은 동물적 신념을 보여주는 영화”라고 차이를 설명했다. 최지이 인턴기자

“책을 봐, 책에 다 나와 있어.” 이준익 감독(58)이 책 한 권을 쓱 내민다. 일본 역사학자 야마다 쇼지가 쓴 ‘가네코 후미코’ 평전이다. 새 영화를 내놓고도 “극장에 가라”는 얘기는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책을 읽고 영화를 다시 보면 완전히 다르게 보일 거야, 분명.” 영화 속 인물과 그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온전하게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이 이 감독에겐 영화 홍보보다 앞섰다.

영화 ‘박열’(28일 개봉)은 이 감독이 20년간 가슴에 품어 온 프로젝트다. 1997년 박찬욱 감독, 조철현 전 타이거픽처스 대표와 함께 영화 ‘아나키스트’(2000) 제작을 준비하면서 이름없는 독립투사 박열과 만났다. 1919년 3ㆍ1운동 이후 일본제국주의의 심장부 도쿄로 건너가 일본 권력에 맞선 열혈 청년의 기개가 이 감독을 사로잡았다.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마주한 이 감독은 “박열과 그의 연인 가네코 후미코의 삶을 영화로 만들게 돼 스스로 대견하게 생각한다”며 흐뭇한 웃음을 지었다.

박열뿐 아니라 항일단체 불령사 조직원들까지도 모두 실존인물이다. 메가박스 제공
박열뿐 아니라 항일단체 불령사 조직원들까지도 모두 실존인물이다. 메가박스 제공

민중사관으로 재구성한 근대성

영화의 배경은 1923년 일본 간토대지진과 조선인대학살사건이다. 당시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고 불을 질렀다’는 괴소문이 퍼져 무고한 조선인 6,000여명이 학살됐다. 일본 내각은 항일단체 불령사를 이끌던 박열을 대역사건의 배후로 지목해 화제를 돌리려 했다. 하지만 그는 역사상 “가장 버릇 없는 피고인”이었다. 오히려 일본의 만행을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황태자 암살 계획을 자백하고 사형까지 무릅쓴 법정 투쟁을 벌인다. 그의 곁엔 연인이자 사상적 동지였던 가네코가 함께했다.

영화는 “실존인물의 실화”라는 사실을 알리면서 시작한다. 이 감독은 “영화의 90%를 고증했다”고 힘주어 말했다. 후대의 평전과 가네코의 옥중 자서전은 물론이고 당시 재판 관련 기사를 일본 아사히신문과 산케이신문에서 수급했다. “일본 관객까지 고개를 끄덕일 수 있도록” 재판이 진행된 3년간 일본 내각이 세 번 바뀐 사실까지 반영했다. 그러면서도 여느 상업영화의 절반 수준인 26억원의 저예산으로 제작했다. “화려한 볼거리나 과도한 제작비는 영화의 진정성을 전달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고 봤어요. 오락성을 더하기 위해 돈을 쓰는 건 그분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지.”

박열은 당당하고 호기롭다. “독립투사가 이렇게 경망스러워도 되나 싶을 것”이라는 이 감독의 말대로 박열은 해학과 익살로 일본제국주의를 조롱하면서 재판정과 내각을 가지고 놀다시피 한다. 대역죄로 기소한다는 예심판사에게 “수고했다”며 격려까지 건넨다. “박열을 보면서 내가 만든 ‘왕의 남자’(2005)의 (광대) 장생이 생각났어요. 권력을 조롱하고 저항하는 모습이 박열과 꼭 비슷해. ‘장생 안에 박열 있다’랄까(웃음). 광대가 읊는 사설이 요즘 시대의 힙합 아니겠어. 우리 역사를 민중사관으로 재구성할 필요가 있어요. 그러면 장생 안에서, 그리고 박열 안에서, 능동적이고 주체적인 근대성을 찾아낼 수 있을 거라 봐요.” 열혈 페미니스트였던 가네코의 선택과 행동, 대등한 주체로서 삶을 공유했던 박열과 가네코의 진보적인 관계도 이런 관점에서 “근대성”으로 해석됐다.

동지이자 연인으로 투쟁을 함께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관계는 웬만한 멜로영화보다 애틋하다. 메가박스 제공
동지이자 연인으로 투쟁을 함께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관계는 웬만한 멜로영화보다 애틋하다. 메가박스 제공

시대정신 아닌 시대감성을 얘기할 때

영화는 일제 강점기를 다룬 기존 영화들의 문법에서 벗어나 탈민족적ㆍ탈국가적 관점을 취한다. “일본 권력엔 반감이 있지만 일본 민중에겐 친밀감이 들지”라는 박열의 대사는 이 영화의 지향을 대변하는 선언이기도 하다. “아나키즘의 최종 목표는 권력이 아니야. 페미니즘이 남성 권력에 저항한 이유가 여성 권력을 창출하기 위해서가 아니듯 말이지. 모든 인간은 아나키스트적 성향을 갖고 있다고 봐요. 그런 의미에서 지난 겨울의 촛불들도 아나키스트예요. 그들이 권력을 잡겠다고 광장에 나온 게 아니잖아요.” 박열의 사상은 이렇게 지금 시대와 만나 현재성을 획득한다.

‘평양성’(2011) 개봉 당시 뜻하지 않게 은퇴 소동을 겪었던 이 감독은 ‘소원’(2013) 이후 영화 인생을 새롭게 쓰고 있다. ‘사도’(2015)와 ‘동주’(2016) ‘박열’에 이르기까지 ‘관점’의 변화가 녹아 있다. 작품 제목을 인물 이름으로 지은 이유이기도 하다. “‘평양성’까지는 시대를 통해 인물을 바라봤지만, ‘소원’ 이후로는 인물을 통해 시대를 조명하게 됐어요.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로 시대가 바뀌었기 때문이지. 나는 영화에서 시대정신을 얘기한 적이 없어. 하지만 시대감성은 담았지.”

이 감독은 영화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주입하려는 것을 경계한다. 대신 태도와 자세를 가다듬는 데 열정을 쏟는다. “영화는 찍을수록 어려워. 의미 부여를 하려다 자칫 독선에 빠질 수 있거든. 아무렴, 영화를 찍는다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야.” ‘시대극 거장’의 괜한 엄살이다. 그래서 그렇게 어려운데 영화를 왜 찍냐는 ‘도발적’ 질문을 던져봤다. “내가 보고 싶어서 그래. 박열이 서 있던 그 현장을 말이야. 내가 보고 싶은 걸 남의 돈으로 찍는 ‘이상한 놈’이지, 내가. 하하하.”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이준익 감독은 “이제훈에게 기대어 영화를 찍었다”며 “이제훈이 자신의 내면과 만나 시늉에만 그치지 않는 고차원의 연기를 보여줬다”고 평했다. 최지이 인턴기자
이준익 감독은 “이제훈에게 기대어 영화를 찍었다”며 “이제훈이 자신의 내면과 만나 시늉에만 그치지 않는 고차원의 연기를 보여줬다”고 평했다. 최지이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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