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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TV에서조차 낙오됐던 밑바닥 인생 진짜 삶을 그렸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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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TV에서조차 낙오됐던 밑바닥 인생 진짜 삶을 그렸죠"

입력
2014.08.14 1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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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명관
천명관

밑바닥 인생은 늘 흥미로운 주제지만 소설가 천명관이 그리는 밑바닥의 모습은 얄궂다 싶을 정도다. 그것은 얼굴에 사내처럼 까뭇하게 수염이 난 주인집 여자가 내지르는 간지러운 교성을 매일 밤 베니어 합판을 사이에 두고 들어야 하는 20대 청년의 사정 같은 것이라, 울어야 할지 웃어야 할지 흥분해야 할지 벽을 쳐야 할지 헷갈리는, 현실의 모호한 폭력과 똑 닮았다.

천명관 소설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소설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노동자'

천명관 작가가 소설집 ‘칠면조와 달리는 육체 노동자’로 돌아왔다. 장편 ‘나의 삼촌 브루스 리’ 이후 2년만, 단편집으로는 7년만이다. 배에 오줌 호스를 꽂고 밤새 콜록대는 할아버지와 남편에게 맞아 앞니가 다 부러져 말할 때마다 입을 가리는 늙은 엄마, 3만원에 시체를 실은 차를 두말 없이 운전하는 대리기사 등 바닥을 기는 인생들에 대한 애증 어린 관찰은 여전하다. 그러나 이 인물들이 여느 소설들처럼 작가의 사회고발 의식에 복무하기 위해 탄생한 캐릭터는 아닌 듯 하다. 12일 합정역 인근에서 만난 작가는 그들을 “미학적이지 못해 소설과 TV에서 낙오된 이들”이라고 불렀다. “언제부턴가 우리 사회의 정서가 공감에서 선망으로 바뀌었어요. ‘난닝구’ 걸치고 돼지부속집에서 소주 마시는 노가다 일꾼은 사라지고 재벌2세와 딸기 프라푸치노가 진짜 삶인 것처럼 행세하지만 현실은 전자가 절대 다수죠.”

작가는 밑바닥 인생들, 그에 따르면 진짜 삶을 사는 이들에게서 고집스레 눈을 떼지 않는다. 표제작의 주인공 경구는 일당 7만2,000원을 받고 냉동고에서 뼈가 삭도록 일한다. 마누라는 그에게 맞아 도망 갔고, 아들은 편의점에서 일하며, 딸은 집에서 도통 입을 열지 않아 잘은 모르지만 옷가게에 다니는 것 같다. 왜 모든 주인공의 불행이 마누라의 도주에서 시작하느냐는 질문에 작가는 자신의 ‘행복론’을 꺼냈다. “저는 농담으로 마음에 드는 여자가 있으면 고기를 사주라고 말해요. 남자는 바깥에서 고기를 구해오고, 여자는 동굴에서 고기를 기다리던 태초의 삶의 원리, 삶의 본질이 아직도 우리 세포에 박혀 있을 거라 믿는 거죠. 그 이상의 것들은 제 눈엔 과잉이나 허영으로 보여요.”

그가 말하는 ‘그 이상의 것들’은 이런 것이다. ‘전원교향곡’의 부부 중 아내는 순면 생리대와 비누를 직접 만들어 쓰며 대안적 삶을 외치는 ‘배운 여자’다. 남편을 부추겨 귀농을 감행한 그는 너그러울 줄 알았던 대자연이 내놓은 척박한 소출과 이웃한 돼지 축사의 끔찍한 냄새, 그리고 집 안을 점령한 파리떼에 두 손 들고 항복한다.

지식의 과잉, 사유의 과잉으로 고기에 만족하지 못하게 된 여자를 대자연이 응징한다는 설정은, 자못 흥미로우면서도 반항심을 불러 일으킨다. “니들이 인생을 알아?”라고 외치는 '난닝구 아저씨'의 목소리가 저 멀리서 들려오는 것이다. “저를 꼰대라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1970년대부터 2010년까지 한국 사회의 변화를 목격한 사람으로선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것 같아요. 지난 10~20년 간 유례 없는 풍요가 만들어낸 지금의 삶의 양식들이 제 눈에는 영 믿음이 가지 않는 거죠.”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인간이 수용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는 순간 꼰대가 탄생한다고 가정하면, 그는 확실히 꼰대다. 하지만 386 꼰대가 아닌 원시시대 꼰대라면 어떨까. 먹고 자고 섹스하는 것이 생의 행복이라고 외치는 작가의 말은,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이 시대의 수많은 세련된 ‘어른아이들’을 향한 할아버지의 잔소리처럼 귀찮고 따뜻하고 듣기 싫고 안심된다.

황수현기자 so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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