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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고교의 ‘하향 평준화’ 보다 두려운 것

입력
2017.06.29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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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율형사립고등학교 폐지를 반대하는 자사고학부모연합회 회원들이 지난 26일 집회를 마치고 서울시교육청으로 행진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자율형사립고등학교 폐지를 반대하는 자사고학부모연합회 회원들이 지난 26일 집회를 마치고 서울시교육청으로 행진하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ssshin@hankookilbo.com

몇 년 전 타 언론사 선배기자가 중3 자녀의 유명 자율형사립고 면접을 앞두고, 리허설을 한다며 다른 기자들에게 면접관 역할을 요청했다. 낯선 어른 앞에서 아이가 자신의 의견을 이야기하는 면접을 미리 치러보겠다는 것. 어필할 감동적인 체험 스토리를 골라서 의견을 묻기도 했다. 등 뒤로 듣기만 했는데도, 또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이었지만 묘한 패배감이 밀려왔다. 그 아이가 훌륭한 아이인지 아닌지를 떠나, 자녀의 고입 면접 리허설을 해야 한다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저소득층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였다면 전혀 다른 인생을 살게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누군가는 ‘아 자사고 면접은 저렇게 준비해야 하는구나’라고 정보로 접수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 같다. 그 선배 기자의 자녀는 합격했다고 들었다.

계급 투쟁으로까지 보이는 외고ㆍ자사고ㆍ국제고 폐지 문제는 수많은 논의의 층위가 있다. 기자이지만 입시제도 기사만큼 도망치고 싶은 것도 없다. 노력해도 마음에 드는 답을 내놓을 수 없으니 말이다. 때문에 여기서 “고교를 전부 하향 평준화 시키자는 것이냐”는 외고 등의 폐지 반대 논리에만 주목하려 한다. 이 협박성 멘트는 나라를 이끌 인재들을 잃을지 모른다는 일말의 불안감을 불러일으키는 효과가 분명 있다.

내 오랜 의문은 ‘하향 평준화’의 기준은 무엇이고, 그것을 확정 짓는 시점은 언제이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명 자사고에 가서 ‘상향 평준화’된 수업의 혜택을 입고, 일반고에 다녔다면 받았을 수능 점수보다 10점 더 높은 점수를 받은 아이가 있다고 치자. 고교 동창들은 대부분 의사, 대기업 직원, 공무원, 혹은 재벌가 자녀 등이고 자신은 판사가 됐다. 그 판사는 ‘하향평준화’ 된 일반고를 나와 수능성적이 더 낮았던, 그리고 평범한 친구들을 둔 판사보다 더 훌륭한 판사인가? 나는 평준화 세대로 뺑뺑이의 축복 속에 일반고를 다녔다. 내가 외고ㆍ자사고를 가서 수능 점수를 높이고 그럴듯한 직업을 가진 친구들을 더 많이 가지게 됐다면 나는 더 훌륭한 기자가 됐을까? 자사고에서 수학을 더 잘하게 돼서 의대를 간 학생은 더 훌륭한 의사가 되는 건가? 외고ㆍ자사고가 명문대 입학비율을 서로 높게 차지하려는 제로섬 게임에서 그저 우위를 차지하려는 제도가 아니라면, 그리고 상위층끼리의 인적 네트워크를 단단히 해서 그들만의 특권을 누리는 위한 제도가 아니라 사회에 꼭 필요한 제도라면, 이 질문에 대한 답이 있어야 한다.

‘미생’의 만화가인 윤태호 작가는 고교 시절 반장이었던 한 부장판사와의 인연으로 그 친구가 속한 판사들 모임에서 강연한 일화를 소개한 적이 있다. 이제 판사들의 출신고교는 대원외고가 가장 많은데, 이 제도라면 두 사람은 친구일 수 없다. 수능 점수가 떨어지는 하향평준화가 위험한가, 끼리끼리만의 교류로 발생하는 경험ㆍ인식 폭의 하향평준화가 위험한가. 후자는 정량화할 수 없으니 존재하지 않는 위험일까. 나는 상위권 학생들의 수능성적이 떨어지는 ‘하향 평준화’보다, 고교 시절부터 비슷한 배경의 친구 밖에 없는 ‘인재들’이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는 판사나 고위공직자가 되는 것이 더 두렵다. 특목고-일반고-특성화고는 가정 소득 수준과 부모 학력을 기준으로 확연히 계층화 됐다는 것은 여러 통계에서 확인됐다. 물론 과학분야는 분리교육을 감수한 수월성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과학고ㆍ영재고는 폐지 대상이 아니다.

덧붙여 자녀를 외고ㆍ자사고에 보내놓고도 외고 등의 폐지를 주장하는 것은 용납될 수 있다고 본다. 그런 공직자들을 두고 자사고 폐지를 반대하는 학부모들은 ‘내로남불’(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하면 불륜)이라는 팻말을 들며 비난했다. 소신을 지킬 경우 (자녀의 미래에 대한) 불이익을 주는 제도를 만들어놓았다면 그 제도를 이용했다는 이유로 비난하는 게 옳은가. 더구나 ‘내 아이만큼은 특별한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이기심을 당당히 드러내는 쪽이, 지행합일을 이루지 못했을지언정 그것을 부끄러워하는 쪽을 조롱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다. 여성학자 정희진씨는 뻔뻔함이 강함과 쿨함이 된 시대를 한탄한 적이 있다. 이기심은 허용되고 때로 북돋음 받는 것으로 족하다. 도덕적 우위까지 가진 냥 행동하지는 말기를 바란다.

이진희 정책사회부 기자 river@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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