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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철현의 정적(靜寂)] 동지(冬至)

입력
2017.12.18 14:46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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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생인류는 수십만 년을 떠돌며 수렵으로 연명했다. 불과 1만 년 전에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 기후가 따뜻해지면서 농업을 발견해 정착하기 시작했다. 인류는 모여 살면서 다른 사람과 소통하며 집단지성을 발휘했다. 문자를 고안하고 도시를 구축하면서 문명을 만들었다. 인류의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는 지구 최악의 빙하기인 4만 년경에 등장했다. 그들의 경쟁자인 네안데르탈인은 추상적 사고능력 결여로 멸절하였다. 사람류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인 우리는 자연이 허락하는 ‘자비’에 전적으로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우리의 생존을 근본적으로 위협하는 괴물이 있었다. 바로 추위였다. 유럽 전체가 빙하로 수십m나 덮여있었다.

눈보라가 몰아치는 혹독한 겨울의 중심엔, 밤의 길이가 길다는 ‘동지’가 있다. 동지는 지구의 북반구에서 낮의 길이가 가장 짧고,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날로 대개 12월 21일이다. 동양에서는 ‘겨울의 한 가운데’라는 의미로 ‘동지(冬至)’라고 불렀고, 서양에서는 ‘태양이 정지되어’ 모든 생물들을 죽게 만들 것 같다고 해서 ‘살스티스(solstice)’라고 불렀다. 인류의 조상들은 수십만 년 동안 이 날을 가장 중요한 축제일로 기념하였다. 동지는 ‘밤의 길이가 가장 긴 날’이지만 동시에 ‘밤의 길이가 짧아지기 시작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영원히 지속될 것만 같은 절망의 시간이면서 동시에 성큼성큼 다가오는 희망의 신호이기도 하다.

동지에 관련된 가장 유명한 이야기가 그리스도교 경전인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다. 예수의 탄생과 ‘동방박사’라고 불리는 신비한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다. 예수의 탄생이야기는 네 권의 복음서들 중 가장 먼저 기록되었다는 ‘마가복음’(기원후 70년)이나 가장 후에 기록된 ‘요한복음’(기원후 120년)에서는 찾을 수 없다. 이 두 권 사이에 기록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에서만 예수의 탄생이야기가 수록되었다. 아마도 이 두 권의 저자들은 동방박사 이야기가 그리스도교 정체성에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 같다. 예수의 탄생이야기는 인류가 오랫동안 간직해온 ‘동지’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

그 이야기에서 가장 신비한 인물은 ‘동방박사’다. ‘동방박사’는 고대 페르시아 종교의 사제인 ‘마구스(magus)’를 잘못 번역한 말이다. 페르시아에서는 기원전 7세기 ‘짜라투스트라’라는 예언자가 등장해 빛의 신인 ‘아후라마즈다’를 찬양하고 어둠의 신은 ‘앙그라 마인유스’를 배척하는 종교를 주장했다. ‘짜라투스트라’라는 말은 고대 페르시아어로 ‘늙은 낙타를 가지고 있는’이란 의미로, 낙타를 타고 대상무역에 종사하던 사람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가 주장한 종교는 후에 페르시아 제국의 완성자인 다리우스 대왕에 의해 수용되어,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가 되었다. 이 종교를 ‘마즈다교’, 그 사제를 ‘마구스’magus라고 불렀다. 마구스는 하늘의 별을 보고 점을 치기도 하는 점성술가였다. 후대 그리스인들은 ‘짜라투스트라’를 ‘별(aster)를 관찰하는(zoro) 사람’이란 의미로 잘못 번역하여 ‘조로아스터’라고 불렀다. 조로아스터교는 기원후 1세기부터 로마 군인들 사이에 급속하게 전파된 태양신 종교인 ‘미트라’교가 되었다.

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저자들은 조로아스터교의 사제인 ‘마구스’, 즉 ‘동방박사’ 3명이 밤하늘에 뜬 신비한 별을 보고 페르시아에서 이스라엘의 베들레헴으로 낙타를 타고 걸어온 이야기를 중요하게 다루었을까? 동방박사는 절망 가운데 희망을 본 사람이다. 살을 에는 추위가 지속되는 한 밤에, 더 이상 다음날 아침 태양이 뜰 것 같지 않은 한 밤중에 한없이 빛나는 별을 본 자들이다. 이 별의 등장은 이제 밤이 짧아지고 낮이 길어지는 신호이기도 하다. 동지는 하지로 가는 긴 여정의 시작이기도 하다. 하늘의 별은 우리가 만지거나 느낄 수 없지만, 밤하늘에 항상 등장해 인간에게 자신의 빛을 보내는 존재다. 동방박사들은 태양도 멈춘 그 혹독한 겨울 밤에 희망의 별을 본 사람들이다. 니체도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다 죽어가는 사변적인 철학과 교리적인 종교에 희망을 이야기 하지 않았는가?

영국의 작가 조앤 K. 롤링은 ‘해리포터 시리즈’ 소설로 절망적인 현대인들에게 빛의 세계인 판타지를 보여주었다. 그리스 신화와 소설을 좋아한 롤링은 26살 나이에 출구가 보이지 않는 컴컴한 터널에 갇힌 자신의 초라한 모습을 이렇게 덤덤하게 표현한다. “나는 누구도 경험하지 못할 만큼 실패했죠. 너무도 짧은 결혼생활은 비참하게 끝났고 저는 실업자며 싱글맘이 되었어요. 영국에서 가장 가난한 사람으로 전락했죠. 나의 부모님이 걱정한, 그리고 내가 내 자신에게 걱정한 두려움이 일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나는 내가 아는 한 가장 실패한 인생이 되었죠.” 롤링은 그 깜깜한 밤에 두 가지 별을 발견하였다. 자신의 상상력과 그것을 표현하는 오래된 타자기. 며칠 후 다가오는 동지에 내가 발견해야 할 나의 별은 무엇인가?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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