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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령의 길 위의 이야기] 가스등

입력
2016.10.24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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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8년에 개봉한 ‘가스등’이라는 영화가 있다. 잉그리드 버그만이 주인공 폴라 역을 맡았다. 폴라의 남편 그레고리는 집안의 가스등을 어둡게 만들어놓고선 “집안이 왜 이렇게 어둡지” 묻는 폴라에게 “그렇지 않아. 당신이 잘못 본 거야”라며 그녀의 예민함을 탓한다. 거듭되는 그레고리의 질타에 폴라는 점점 혼란에 빠지고, 그녀의 유산을 노린 그레고리의 수작임을 알 리 없는 폴라는 “정말 내가 이상한 건가. 내가 그렇게 예민한 건가” 스스로를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른다. 심리학 용어 ‘가스라이팅(Gas-Lighting)’의 유래다.

문화계 전반에서 터져나오는 성폭력 피해 고발로 연일 뜨겁다. 가스라이팅은 가깝고 친밀한 사이에서 일어나기 쉬운 정신적 학대이지만 사회적 가스라이팅 역시 도처에서 일어날 수 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쉽게 입을 열 수 없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자신을 겨눈 사회적 가스라이팅이다. “너한테 친절하게 대해주려고 한 걸 네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인 거 아냐?” 혹은 “다른 사람들은 괜찮았다던데 왜 너만 유독 그래?” 그런 시선 속에서 피해자는 점점 움츠러들고 스스로를 도리어 의심하기 십상이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는지 하나하나 되짚다 보면, 그들의 말처럼 나는 정말 그 남자의 손을 뿌리치지 않았고 그 남자에게 술을 따라주었으며 급기야 그 남자에게 웃어 보이지 않았나, 그건 정말 내 잘못이지 않은가. 이상한 죄책감을 덮어쓰고 이제 그녀들은 자신이 만든 감옥에 덜컥 들어앉게 되는 것이다. 의도하지 않은 가스라이팅도 잔인하다. 그녀들을 잠시라도 옮겨둘, 안전한 방이 아직은 없다.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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