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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진 칼럼/10월 1일] 정치의 금도, 계영배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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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병진 칼럼/10월 1일] 정치의 금도, 계영배 이야기

입력
2013.09.30 1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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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인호씨의 부음을 듣고 그의 말과 얘기들이 생각났다. 그 가운데서도 '나의 기쁨은 누군가의 슬픔에 빚을 지고 있다'는 말과 '계영배(戒盈杯)' 얘기가 오래 남았다. 나와 누군가의 기쁨과 슬픔은 서로 얽매여 있다는 세상의 이치는 참 좋은 말이다. '가득 채우는 것을 경계해야 하는 잔'이란 의미의 계영배는 누구든 어디서든 항상 되새겨야 할 얘기다.

옛날 중국에서 재물을 모은 도공이 더 욕심을 부리다 신세를 망친 뒤 반성하며 만들었다는 물건이다. 바닥에 구멍이 뚫려 있고, 그 위에 용의 조각이 세워져 있다. 술을 80% 정도 부으면 용 조각이 구멍을 막아 술이 새지 않는데, 더 부으면 술이 구멍으로 새어 나간다. 흥미로운 점은 일단 새기 시작하면 이미 따라져 있던 술까지 한 방울도 남지 않고 모두 빠져나가 텅 빈 그릇이 되어버리는 모습이다. 조금 더 부으려다 모든 것을 잃게 된다는 경고다. 춘추시대 패자였던 제(濟)나라 환공(桓公)이 곁에 두고 천하통일 욕심을 다스렸고, 공자도 늘 간직하고 있었다 한다. 요즘은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이 종이컵과 빨대를 이용해 '계영배 만들기' 실습을 하고, '욕심을 더 부리면 가진 것을 다 잃는다'는 교훈을 배우고 있다.

한국일보에 연재됐던 최인호씨의 장편 에 상인이 갖춰야 할 금도(襟度)의 상징으로 계영배가 등장한다. '나를 낳은 사람은 부모, 나를 이룬 것은 하나의 잔'이라는 말도 남겼다. 어디 비즈니스만 그렇겠는가. 최근의 정치 상황을 보면 그 금도는 '상도'에서보다 '정도(政道)'에서 더욱 절실해 보인다. '상도'의 부재는 개인과 집단의 몰락에 그치지만 '정도'가 사라지면 피해가 고스란히 국민에게 넘어온다.

올여름 여야는 오랫동안 심각하게 대치했다. 새누리당은 새누리당대로, 민주당은 민주당대로 자신들의 주장과 요구를 80%쯤에서 제어하기는커녕 100% 달성하겠다며 싸웠다. 국정원 댓글 사건으로 촉발된 대치는 결국 '모 아니면 도' 형국으로 치달았다. 여권에선 터무니없는 정치공세라는 전제에서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고, 야권은 박근혜 대통령의 당선까지 재고해야 한다는데 목표점을 설정했다. 그러한 전제와 목표에서 조금도 수위를 낮추지 않았으니 타협점은 애초 존재할 여지가 없었다. 결국 철철 넘치도록 잔을 채우는 꼴이 되었고, 그나마 남았던 신뢰감마저 모두 잃는 결과가 됐다.

청와대 비서실의 모습을 보면 저러다가 언젠가 계영배 밑바닥에 구멍이 뚫리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이 든다. 양건 전 감사원장, 채동욱 전 검찰총장, 진영 전 복지부 장관의 인사파동에 김기춘 대통령비서실장 체제 비서실의 간여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이들 세 사람이 현직에서 배제된 동기는 제각각 다르지만 결과로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대통령의 효율적인 업무 추진'이다. 하지만 언제나 갈등과 파문이 심각하게 붙어 다녔다. 원인은 밀어붙이기 형태의 과잉 보좌에 있는 듯하다. 정도, 정치적 금도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고 있다는 우려가 들지 않을 수 없다.

여의도 주변의 여야간 대립도 그렇고, 청와대 비서설의 행태도 그렇다. 목표의 80%쯤에서 스스로 제어하는 지혜가 절실하다. 일단 국회가 열렸다니 여야가 잔을 넘치게 하지 않을 기회는 찾아낸 셈이다. 상대에게 100%의 패배를 강요하려 들면 거꾸로 자신의 모든 것을 잃을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국민의 이목이 집중돼 있는 청와대 비서실 역시 '100% 강박관념'을 제어해야 한다. 자칫 좀 더 잔을 채우려 들다가는 모든 것이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경고를 소홀히 넘겨서는 안 된다.

비슷한 서양 속담에 '깃털 하나가 낙타의 등을 부러뜨린다'는 말이 있다. 깃털 하나를 더 싣기 위해 욕심을 부리다가 낙타를 죽이는 어리석음을 범한다는 얘기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는 욕심은 그것이 비록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잘 담아 놓았던 술잔을 바닥까지 비게 하고, 튼튼한 낙타의 등을 부러지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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