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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귀

입력
2016.11.2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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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할 오늘] 11.24

1994년 출간된 공덕귀 자서전 '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여성신문사). 그는 책을 내고 3년 뒤인 97년 오늘 별세했다.
1994년 출간된 공덕귀 자서전 '나 그들과 함께 있었네'(여성신문사). 그는 책을 내고 3년 뒤인 97년 오늘 별세했다.

윤보선(1897~1990)은 가장 존재감 없는 대통령 중 한 명으로 꼽히지만, 빼어난 행정가였고, 주요 갈림길마다 크게 그르지 않은 선택을 했던 정치인이었고, 또 독립운동가였다. 4ㆍ19 직후 민주당 신ㆍ구파가 대통령으로 공동 추대했을 만큼 인품도 그리 유난스럽지 않았다고 한다. 1948년 서울시장으로 6개월 남짓 재임하는 동안 그가 역점을 두고 시행한 신생활운동- 방역ㆍ소독 활성화, 쓰레기 수거 독려, 수세식 변기 보급, 허례허식 타파 등-과 투명 시정(행정 공시) 등은, 훗날 스스로도 관직 생활 중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다고 회고했듯이, 수도 서울을 단시일 내에 혁신하는 큰 계기였다.

조선신학교 여자신학부 전임강사 공덕귀(1911~1997)가 그를 만난 게 그 무렵이었다. 가족을 비롯해 주변 여러 목사들의 권유도 있었겠지만, 30대 중반의 공덕귀에게 50대 초반의 행정가 윤보선은 프린스턴대 유학을 포기해도 좋을 만큼 매력적이었던 듯하다. 둘은 이듬 해 윤보선이 상공부 장관이 된 49년 결혼했다. 윤보선의 대통령 취임과 5ㆍ16 쿠데타, 군사 독재와 유신의 긴 세월 동안, 부부는 각자의 영역에서 민주화와 반독재 투쟁에 헌신했다. 윤보선의 무대가 주로 제도 정치권 안이었다면, 공덕귀의 무대는 더 험한 재야였다.

경남 통영의 가난한 집 7남매 중 둘째 딸로 태어나 어렵사리 학교를 다니며 일본서 신학을 공부한 공덕귀는 총독부의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고초를 겪으면서도 거부한 이였다. 목회와 교육에 전념하던 그의 삶이 반독재 민주화운동으로 전환하게 된 것도 윤보선과의 인연이 결정적인 계기였을 것이다. 그는 다양한 교회 여성단체 리더로서 여성ㆍ노동자 인권 및 생존권투쟁에 헌신했고, 79년 YH사태 때도 대책위원의 한 명으로 활동하다 연행되기도 했다.

80대의 윤보선이 전두환 군사정권의 국정자문회원으로 참여해 의전용으로 제공된 승용차를 타고 다닐 때, 70대의 공덕귀는 재야ㆍ종교 인사들과 더불어 신군부 광주학살 규탄 서한을 작성해 미 대사관에 전달했다. 그 무렵 부부는 꽤 다투기도 했다지만, 또 남편을 통해 인혁당 관련자 사면ㆍ감형 등을 적극 도모하기도 했다고 알려져 있다. 남편과 달리 공덕귀는 흠 없이 살다가 1997년 11월 24일 별세했다. 향년 86세. 최윤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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