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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1971년 적십자 접촉 열리며 남북 소통 공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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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문점, 1971년 적십자 접촉 열리며 남북 소통 공간으로

입력
2018.04.27 14:33
14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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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도끼 만행 사건으로

남북 자유롭게 오가던 공간에

5㎝ 높이 시멘트 턱 군사분계선

문재인 대통령이 1976년 8월 21일 공수부대 소속 상병으로 투입됐던 8ㆍ18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관련 미루나무 제거 작업 사진. 국가기록원 자료사진
문재인 대통령이 1976년 8월 21일 공수부대 소속 상병으로 투입됐던 8ㆍ18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 관련 미루나무 제거 작업 사진. 국가기록원 자료사진

판문점은 남북 분단사 그 자체라 해도 될 정도로 남북 간 대화와 대립이 이어졌던 공간이다.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 간 남북 정상회담이 다른 곳도 아닌 판문점에서 열리며 또 한번 분단 역사에서 획기적 전환점을 만들어낸 역사적 명소로 거듭나게 됐다.

서울과 평양으로부터 각각 60㎞와 210㎞ 떨어진 판문점은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6ㆍ25전쟁 정전협정 논의 장소로 출발했다. 널빤지로 만든 문이 많은 마을이어서 널문리로 불렸는데, 이를 한자로 표현해 판문점(板門店)이 됐다.

이 작은 시골 마을이 전세계가 주목하는 남북 간 소통의 공간이 된 것은 1971년 남북적십자 접촉이 열리면서다. 남북은 여기서 원활한 연락업무 수행을 위한 남북연락사무소와 직통전화 설치에 합의했고, 이때 남측 자유의집과 북측 판문각이 각각 세워졌다.

고 정주영 당시 현대그룹 회장이 1998년 6월 소 500마리를 이끌고 판문점을 통해 방북하는 장관이 연출된 곳도 판문점이다. ‘소떼 방북’은 이후 2000년 첫 남북 정상회담과 남북 간 경제협력의 토대가 됐다. 소떼가 지나간 이 길에 문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이날 남북 정상회담을 기념해 소나무를 심었다.

판문점은 또한 남북이 여전히 군사 대치 상태라는 비극을 드러내온 공간이기도 하다. 자칫 전쟁으로 이어질 뻔한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대표적이다. 1976년 8월 한국군과 미군이 북측 초소를 가린 미루나무 가지 치기 작업을 이뤄지자, 북측이 작업 중단을 요구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북한군이 도끼로 미군 장교 2명을 살해한 사건이다. 이 때 판문점 내 5㎝ 높이의 시멘트 턱으로 만든 군사분계선을 그으며 양측이 비교적 자유롭게 오갔던 판문점도 남북으로 쪼개졌다.

1984년 11월엔 판문점에서 총격전도 벌어졌다. 당시 소련측 관광 안내원이 갑자기 남측으로 귀순하자 북한군이 총격을 가했고, 이 과정에서 한국군 1명과 북한군 3명이 사망했다. 지난해 11월엔 북한군 하전사였던 오청성씨가 북한군의 총격을 받으며 판문점을 통해 남측으로 귀순한 사건도 발생했다.

판문점 주변 ‘돌아오지 않는 다리’와 ‘72시간 다리’ 역시 남북 간 비장했던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의 원래 이름은 ‘널문다리’였으나 전쟁 중 남북한 포로들이 정전협정 조인 후 이 다리를 통해 교환되면서 ‘돌아오지 않는 다리(bridge of no return)’라는 이름이 붙었다. 도끼만행사건 뒤 돌아오지 않는 다리가 남측에 의해 폐쇄되자 북측이 새로 놓은 다리가 72시간 다리다. 다리를 놓는 데 72시간 걸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영빈 기자 peoplepeopl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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