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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 여성주의 시선으로… 적·녹·보랏빛 세상을 꿈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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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진 여성주의 시선으로… 적·녹·보랏빛 세상을 꿈꾸다

입력
2015.08.30 0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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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춘 행위를 성 노동 주장 "성매매특별법은 또 다른 폭력"

주류 페미니즘서 벗어난 소수 입장, 진보 양심적 남성들 반발 사기도

자본주의 체제로서나 가부장 체제로서 한국 사회에 대해서 가장 도전적인 사람이 누구일까. 이론적으로 동시에 실천적으로 말이다. 나는 그/녀(이하 ‘그’로 통일)가 바로 고정갑희라고 생각한다.

그의 젠더는 여성이고, 직업으로는 한신대 영문과 교수이며, 시민운동가로서는 지구지역행동네트워크(Network for Glocal ActivismㆍNGA)의 집행위원장이다. NGA는 지구지역 운동(Glocal Activism)을 제창하고 있는데 북반구와 서구 중심이 아닌 남반구 연계 운동을 지향한다. 요컨대 NGA는 적, 녹, 보라의 연합을 꾀하는 페미니즘 사상을 기반으로 하는 운동이다. 여기서 ‘적’은 마르크스주의와 노동운동을, ‘녹’은 생태주의와 환경운동을, ‘보라’는 여성주의와 여성운동을 가리킨다.

좀 더 개인적인 프로필을 소개하자면 다음과 같다. 그의 호적상 성씨는 ‘고’다. 술자리 인터뷰에서, 어머니의 성이라서 따왔다는 ‘정’이란 것도 따지고 보면 외할아버지의 성이니 결국 가부장제에 넘어가는 것이 아니냐고 짓궂게 내가 묻자, 그는 “‘Gogo’란 닉네임을 쓸 때도 있었다”고 답했다. 그 닉네임의 취지는 아마도 ‘가자 가자! 페미니즘의 세계로’일 테지만, 어쨌거나 난 1970년대 고고장 세대니까 그의 그런 답이 좋았다.

도발적인 하드코어 페미니스트

그는 경북 출생이고 서강대 영문과를 졸업한 뒤 서울대에서 영문학 석박사 과정을 거쳐 미국 뉴욕대에서 영문학 박사 학위를 땄다.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인 영국의 여성 작가 메리 셸리를 통해서 페미니즘 문제를 깊이 파고들었다고 한다.

메리 셸리는 영국 낭만파 시인 셸리의 아내였는데 ‘프랑켄슈타인’ ‘최후의 인간’ 같은 작품을 쓴 이다. 메리의 성을 고정갑희처럼 짓는다면, 고드윈 울스턴크래프트가 된다. 메리의 어머니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였고, 아버지는 윌리엄 고드윈이었으니까. 메리가 쓴 작품들에는 기괴하고 음울한 사람들이 나오는데,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씩 죽어간다. 고정갑희는 이것을 남성 지배의 상황에서 고통 받는 여성이 뿜어내는 분노로 읽었다고 한다.

나는 고등학교 친구들 모임에서 대개 왕따가 된다. 골프 얘기에 전혀 끼어들 수 없기 때문인데, 그래도 의연할 수 있는 것은 20대 초반부터 꿋꿋하게 내 취미를 지켜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르크스 오덕’이라는 것인데 “너희들이 골프 치기 훨씬 전부터 나는 마르스크를 쳤어…. 내 핸디는 이미 20대부터 싱글이었어…ㅠ_ㅠ” 내놓고 말은 안 하지만 뭐 이런 식인 것이다.

마르크스 오덕의 입장에서 고정갑희의 주장은 매우 도발적이고 거북하다. 30대 후반의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했다. “피아노 제작자는 생산적 노동자이지만 피아니스트는 그렇지 않다. 피아니스트는 음악을 생산하고 우리의 음향 감각을 충족시켜 주며 그의 노동은 무언가를 생산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노동이 경제적인 의미에서 생산적인 노동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고정갑희는 성 착취와 성 노동을 말한다. 착취와 노동 개념 말고 다른 개념을 써야 하는 게 아니냐 라고 내가 묻자 그는 “왜, 안돼?”라고 반문한다. 나로서는 말문이 막힌다. 그 말은 내가 늘 자본주의 체제의 경제 원리와 도덕, 혹은 아비튀스에 대해서 던졌던 정신적 화염병과 똑같기 때문이다.

성매매방지특별법은 폭력이다

나는 페미니즘 앞에서 굴복한다. 페미니즘의 통찰과 주장이 기본적으로 맞고 올바르기 때문이다. “ㅆㅂ… 그래, 나는 제국주의자고 억압자고 착취자야!” 양심적인 ‘학삐리’로서 나는 이런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무엇보다, 개인적 혹은 사적으로, 나를 낳고 키워주고 보살펴 주었거나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는 여성들, 그러니까 외할머니, 어머니, 아내, 딸, 여친, 여자인 친구, 여자 선후배 등에게 나는 존재론적으로 큰 빚을 지고 살아왔고 살아가고 있다. 아니, 나는 여전히 매일 착취와 수탈을 저지른다.

고정갑희는 성 노동을 말하고, 성 관계를 말하고, 성 장치를 말한다. 그것은 마르크스의 사회적 노동, 생산 관계, 국가 장치 등에 기대면서 그것을 넘어섬과 동시에 그것들을 폐기한다. 공장 노동자만 노동자가 아니라 젠더 노동이나 섹슈얼리티 노동을 하는 여성들도 노동자며 착취를 당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는 종 체계와 종 착취까지 언급한다.

그러니까 고정갑희가 다른 페미니스트와 다른 점은 하드코어하게 나간다는 것이다. 쉽게 예를 들자면, 비정규직 노동운동이 중요하긴 하지만 그저 단순히 비정규직 노동자에 추상적으로 주목하기보다는 이주민 외국 여성 비정규직 노동자에게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듣고 보면 맞는 얘기다. 이건 예수와 관세음보살의 입장이나 태도를 구체적 현실에 구체적으로 적용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가 주류 페미니즘과 어긋나기 시작한 것은 소위 매춘 성 노동자들의 현실과 마주치면서부터다. 그는 매춘이 성 노동의 일종이라고 본다. 매춘 여성을 피해자로 놓고 매춘을 근절시키려는 것은 성 노동자들의 생존권, 노동권, 인권을 억압하는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성매매방지특별법이 제정된 2004년 이후 집창촌을 폐쇄하려던 것을 그는 특별한 종류의 노동자인 여성에게 또 다른 낙인과 폭력을 가하는 것으로 보는 입장에 서 있다. 그의 이러한 실천적 입장은 페미니즘 안에서도 소수파에 속한다.

그와 그가 속한 그룹의 이러한 입장은 소위 가부장제에 묶여 사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론이고 주류 페미니즘, 그리고 페미니즘에 동조적인 많은 진보적, 좌파적 혹은 양심적 남성들에게 반발심을 불러 일으켰다. 이에 관해서는 이견이 있을 수 있고 토론도 가능할 테지만 조금만 생각해 봐도 그의 입장이 옳다는 것은 분명하다. 무엇보다도 당사자인 여성들 스스로가 성 노동자로서 자기의 사회적 존재를 그렇게 규정하고 있고 지금 자신들의 억압된 권리를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 힘들 수 있지만 이성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담배는 끊어도 가부장제는 못 끊어

사실 톡 까놓고 말하자면, 어떠한 페미니즘이든 간에 제국주의자인 남자의 입장에서는 페미니즘을 정서적으로 받아들이기는 힘들다. 압제자와 착취자로서 살아 왔기 때문에, 크게 깨우쳐서 몸과 영혼을 통째로 바꾸지 않는 한, 앞으로도 대부분 제국주의자로서 살아가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담배를 끊는데 성공한 남자들은 있지만 가부장제를 끊는 남자들은 극히 드물다. 페미니즘이 제기하는 문제들을 머리로만 납득하거나 이해하는 건 아무 것도 아니다.

결국 몸과 영혼 모두가 문제다.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게 바로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우리 남자들의 에토스고 아비튀스인 것이다. 결국 따지고 보면, 인류가, 그러니까 정치적으로 올바르게는, 남성들이 여성들을 최초의 노예 내지는 재산으로 만든 이래, 수 천년 간 지속되어 온 일상적이고도 무의식적인 삶의 끈질긴 관성이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마르크스 오덕인 내 입장에서는 그가 쓴 안경이 보라색이라는 것이 문제다. 그가 적, 녹, 보라의 연합, 정확하게는 이 삼자의 패러다임을 말하고 있으면서도, 결국에는 보라의 필터로 세상을 보고 있다는 게 문제인 것이다. 물론 뒤집어 보면, 내 입장은 빨간 안경이라서 문제가 될 터인 것이다. 하지만, 그처럼 하드코어하게 밀고 나가서 생각해 본다면, 내가 속한 젠더 및 정치적 그룹 안에도 여러 가지 색조가 있으므로, ‘진짜 빨강’을 주장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아마도 내가 핑크나 오렌지로 보일 것이다. 물론 오덕인 나의 입장에서는 핑크나 오렌지도 감지덕지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색깔을 가리키는 단어 중 한자어가 아닌 토착어가 살아남은 것은 오방색 외에는 보라색뿐이라고 한다. 영어권에서는 ‘purple’과 ‘violet’이 서로 분명하게 나뉘는데, 정확하겐 ‘퍼플’은 보라색 중 빨강의 비율이 더 높은 색을 일컫는 단어이며, ‘바이올렛’은 파랑의 비율이 더 높은 색을 말한다고 한다. 영어권 사람들은 일반적인 보라색이라면 ‘퍼플’을 더 많이 사용한다는 것이다. 고정갑희의 설명에 의하면 그의 보라는 영어로 ‘purple’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색깔이 빨강에 가까운 보라라고 하더라도, 핑크나 오렌지인 나로서는 그가 예컨대 라벤더라든가 라일락을 꿈꾸고 있지 않는 게 유감이다. 무지개색이 되려면 아직 멀었다는 얘기다. 물론, 아직 세상을 보라 필터로 보는 게 더 중요하고 우선적이라고 믿는 그로서는 이렇게 받아 칠 것 같다. “진달래가 있잖아?”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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