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기억할 오늘] 비키브니아(5.16)

입력
2018.05.16 04:40
30면
0 0
우크라이나 비키브니아 숲에 세워진 추모비. en.wikipedia.org
우크라이나 비키브니아 숲에 세워진 추모비. en.wikipedia.org

드네프르 강은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를 남동으로 관통하며 흑해로 흘러드는 우크라이나의 젖줄이다. 그 강을 따라 비옥한 체르노젬(흑토)이 열렸고, 주요 공업도시와 남부의 광산들이 성장했다. 비극으로 점철되는 여러 대하 역사소설의 배경이 그러하듯, 우크라이나 현대사도, 비극도 그 강을 따라 진행됐다. 키예프에서 드네프르 강을 건너 북동쪽으로 약 10km 정도 가면 나타나는 1만5,000㎡(약 4,500평) 남짓의 작은 소나무 숲 비키브니아(Bykivnia)도 그 비극의 무대 가운데 한 곳이다. 오늘날 그 숲은 ‘비키브니아 공동묘지(Bykivnia Graves)’라 불린다. 스탈린 치하의 우크라이나인 최소 3만명(많게는 20만명으로 추정)이 ‘내무인민위원회(NKVD)’ 비밀경찰의 고문과 처형으로 숨져 그 숲에 집단 암매장됐다. 러시아가 그 사실을 공식 인정한 것은 1990년대 소비에트 패망 이후였다.

기록으로서의 역사는 권력투쟁 못지않은 힘겨루기의 공간이다. 그건 물리적 대립의 승패 못지않게, 거시 역사에서 특정 주체가 지니는 권력 혹은 영향력에 크게 좌우된다. 스탈린 집단농장 체제 하의 대기근으로 800만~1,000만명이 희생된 1932~33년 우크라이나 ‘홀로도모르(Holodomor)’를 아는 이는 나치의 유대인 ‘홀로코스트’를 아는 이의 10분의 1도 안될 것이다. 2차 대전 중이던 1940년 소련이 자행한 2만여명의 폴란드인 학살(이른 바 ‘카틴 학살’)이 극동의 한국인들에게도 그나마 알려진 까닭은, 냉전기 서방의 반소비에트 선전전 덕이 크지만, 소비에트 체제 하의 폴란드와 우크라이나의 위상, 서유럽과의 물리적 거리의 차이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1920년대 초부터 1940년대 말까지 우크라이나의 반정부(반소비에트 독립파) 인사 등 정치범들을 고문ㆍ학살한 뒤 이 숲에 묻었다. 1990년대 이후 발굴된 집단 매장지만 210곳에 달했다. 그 사실을 덮기 위해 소비에트는 1970년대 이 숲을 밀고 그 위를 콘크리트로 덮어 대형 버스 터미널을 지으려고 했다.

우크라이나 정부는 1994년부터 매장지 발굴과 추모공원 조성 작업을 진행, 2001년 비키브니아 숲을 역사 유적지로 지정했다. 2004년 첫 공식 추모행사가 열린 5월 16일은 우크라이나 추모의 날(The Day of Mourning)이다. 최윤필 기자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