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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그 겨울의 일주일

입력
2018.02.26 16:2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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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의 작은 시골마을에서 보낸 며칠이었고, 그것은 내 평생 가장 인상적인 여행으로 남아있다. 유럽 여행이라면 유레일 패스를 끊어 짧은 기간에 여러 나라를 숨가쁘게 이동하는 여정을 많이 떠올릴 것이다. 내가 무슨 객기로 가성비 최저의 여행을 선택했는지 지금도 모르겠다. 나는 코펜하겐의 철도역에서 지도 한 장을 펼쳐 가장 여행지 같지 않은 곳을 찍었다. 목적지까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일은 외국어 하나를 습득하는 것만큼 어려웠다. 예약을 해둔 곳은 호수를 끼고 있는 민박집이었다. 호수에서 튕겨진 햇빛이 가장 먼저 닿는 별채가 내 방이었고 마당을 건너가면 주인 가족이 생활하는 단층 집이 있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주인집 부엌으로 건너가서 밀도 높은 빵 냄새를 맡으며 호수의 오리들을 바라보았다. 낮에는 자전거를 끌고 동네 길을 걸어 다녔다. 젊은이들이 도시로 떠난 마을에는 노인들이 많았다. 그들의 말은 내 걸음만큼 느려서, 알아 듣기 쉽고 교감하기에 충분했다. 나는 자전거를 세워놓고 그들의 하루와 길었던 지난 날들에 대해 들었다. 낯선 세계의 사람들은 나와 다른 삶을 살고 있었고 그 만남과 이야기들은 내 인생에 없었던 아름다운 골목길을 몇 개 만들어주었다. 소설 ‘그 겨울의 일주일’(메이브 빈치, 문학동네)을 읽은 지금, 나는 다시 그런 여행을 꿈꾼다.

아일랜드의 북서부 해안, 바다를 바라보는 언덕에 스톤하우스라는 호텔이 세워진다. 길지 않았던 미국에서의 결혼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에 돌아온 치키는 여덟 개의 객실과 손님 모두가 모일 수 있는 식당이 있는 공간을 꾸민다. 더블린에서 사고를 치고 어머니의 고향으로 쫓겨온 리거는 공사를 맡고, 대도시의 회사 생활에서 얻은 환멸을 극복 하고픈 올라는 주방을 맡는다. 홍보가 시작 되자 아일랜드와 영국, 그리고 먼 나라에서 첫 손님들이 모여든다. 약혼자의 어머니와 탐색전 여행을 온 간호사 위니, 월드스타의 숨막히는 생활에서 잠시 빠져 나온 영화배우 존, 의미 있는 일과 정착지를 찾아 나선 의사 부부 헨리와 니콜라, 집무실 외의 세상과는 담 쌓고 살아온 은퇴한 교육자 넬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스톤하우스에서의 일주일을 함께 한다. 그리고 이 모든 손님들이 여행지에 발을 디딘 채 지나온 삶을 돌이켜 볼 때, 호텔 주인 치키가 그들 곁에 있다. 인생의 거친 여행을 이미 다녀온 치키는 손님들의 씁쓸한 어제를 달콤한 오늘로 바꾸어주는 마력을 지니고 있다.

소설을 읽는 동안 나는 하나같이 매력적인 등장인물들의 삶으로 걸어 들어갔고, 그들과 똑같은 피로와 허기를 안고 호텔 식탁에 앉았다. 치키와 올라가 마련한 근사한 식사에 몸의 탄력을 회복하고, 바람이 몰아치는 언덕을 걸으며 내게 묻어있던 쓸쓸함을 날려보냈다. 그들은 서로 다른 곳에서 온 다양한 사람들이었고, 매일 다른 햇빛 아래 여러 모양의 감정으로 살아가는 내 모습이기도 했다. 일상과는 다르게 숨쉬기, 다르게 걷거나 말하기. 여행이 주는 이 혜택들을 등장인물들과 나는 함께 나눴다.

떠나야 하는 이유를 이 소설의 어느 인물이 말한다. “여긴 생각하기에 좋은 장소야. 바닷가에 나가면 더 작아진 기분이 들거든. 내가 덜 중요해지는 것 같고. 그러면 모든 것이 알맞은 비율을 되찾게 되지.” 우리가 온갖 여행을 떠나면서 가졌던, 그러나 딱 한마디 말로 설명할 수 없었던 그 느낌이 여기 있다. 내가 내 안의 무게를 감당하기 어려울 때, 그때는 나를 작고 덜 중요하게 만들어줄 장소를 찾아가야 한다. 여행은 삶의 균형이라는 조약돌을 줍는 길이다.

북대서양과 지중해를 거쳐온 바람이 내 앞에 있다. 누군가의 이야기와 나의 현실이 섞인 오늘이 흐르고 있다. 이순간 삶은 여행이 된다. 그러고 보니 모든 소설은 여행서다.

제갈인철 북뮤지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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