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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전통시장을 ‘지키기 위한 변화’

입력
2017.12.11 16:01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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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서 역설적 표현은 시적 풍미와 언어적 묘미를 더하곤 한다. 김영랑 시인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찬란한 슬픔의 봄’을 기다린다고 노래했다. 유치환의 시 ‘깃발’에 나오는 ‘소리 없는 아우성’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모순된 표현이나 상황을 제시하는 목적은 외적 표현보다는 그 내용에 주목하게 해서, 나름대로의 진실이나 주장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좌우명으로 알려진 ‘천천히 서둘러라’라는 말도 역설적 표현이다. 서두르다 보면 천천히 할 수 없고, 천천히 하다 보면 서두를 수 없다. 하지만 빠르게 일을 해야 할 때라도 전후좌우를 잘 살피고 따지면서 서두르라는 말로 들으면 제 뜻이 산다.

광주광역시의 ‘1913송정역시장’은 104년의 역사를 지닌 곳이다. 원래 이름은 송정역전 매일시장이었다. 여타의 전통시장처럼 오랜 역사에도 불구하고 침체를 겪고 있던 시장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난해 전통시장 활성화 프로젝트로 새 단장을 한 이후 젊은이들이 많이 찾는 핫 플레이스이자 광주 여행의 필수 코스로 꼽힌다. 1913 송정역시장 프로젝트는 ‘지키기 위한 변화’를 핵심가치로 내세웠다. ‘지키기 위한 변화’ 역시 역설적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시장은 단순한 시설 현대화에 머물지 않고 지역 특유의 역사와 문화를 되살리는 데 초점을 맞췄다.

우선 시장이 만들어진 1913년에 주목해 이름부터 ‘1913송정역시장’으로 바꿔 100년이 넘는 역사를 강조했다. 시장이 가장 활발했던 1970ㆍ80년대 모습을 최대한 살려 고객들이 그 시절을 기억하고 추억할 수 있는 체험형 공간으로 탈바꿈시키기 위해 점포의 리모델링은 최소화하고 간판도 전통을 최대한 살리면서 현대적으로 디자인해 밝고 젊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디자인뿐만 아니라 정보통신기술(ICT)도 접목해 전통과 현대가 조화를 이루는 데 주력했다.

청년상인의 입주에도 신경을 썼다. 이들 청년 상인이 열정적으로 개발한 양조장 맥주, 식빵, 호떡 등이 하나의 브랜드가 되면서 시너지 효과도 발생했으며, 누구나 어울릴 수 있는 버스킹 문화 공연 등 다채로운 이벤트가 더해져 사람들이 찾지 않던 전통시장이 젊은이들까지 찾는 복합공간으로 성공적으로 변모했다. 더욱이 재미있으면서도 현장교육이 될 수 있는 재래시장 투어는 자녀들과 함께하는 가족여행의 명소가 되고 있다.

누군가는 새롭게 변모한 1913송정역시장을 들러보고 “마치 타임캡슐을 타고 근대로 여행을 갔다 온 것 같다”고 소감을 전하기도 했다. 스토리의 힘이다. 각각의 점포에는 최초에 문을 연 시기부터 가게에 얽힌 이야기가 담긴 스토리보드를 설치해 ‘시간’을 이야기에 녹여 넣었기 때문이다. 전통시장이 대형마트처럼 획일적으로 변화하기 보다는 그 전통시장만의 특색을 부각시키고 지켜내기 위한 변화를 만들어내야 부활에 성공할 수 있다는 점과, 정말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는 변화를 각오해야 한다는 역설적 교훈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는 사례다. 전국의 많은 전통시장이 ‘지키기 위한 변화’로 부활에 성공할 수 있도록, 활성화 노력을 ‘천천히 서둘러’ 주기를 바란다.

노권일 대일감정원 이사(감정평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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