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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평양의 태극기와 평창의 인공기

입력
2017.04.09 1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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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남북한 여자축구 아시안컵 예선전에서 태극기와 인공기가 나란히 펼쳐져 있다. 평양=서재훈 기자
7일 평양 김일성경기장에서 열린 남북한 여자축구 아시안컵 예선전에서 태극기와 인공기가 나란히 펼쳐져 있다. 평양=서재훈 기자

태극기만 쳐다보면 왠지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지는 요즘이다.

헌법재판소로부터 불가역적으로 파면 당한 박근혜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이들이 태극기를 방패 삼아 탄핵과 파면 무효를 외치는 탓이다. 탄핵 정국 와중에 태극기는 ‘빨갱이’와 ‘애국보수’를 구분하는 리트머스 시험지로 소환됐고, 상대를 색깔론으로 공격할 때 가장 유용한 무기로 동원 됐다. 심지어 태극기를 온 몸에 휘감고 내란을 선동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한민국 건국이래 태극기가 이토록 참담한 지경에 내몰린 순간이 있었는지 궁금하다.

하지만 지난 5일 북한 평양에 내걸린 대형 태극기를 보고 마음 깊은 곳에서 큰 울림과 감동이 밀려왔다. 그것도 북한의 심장부인 김일성 경기장에 대형 태극기가 내걸리고, 애국가가 울려 퍼졌다. 여자축구대표팀이 평양에서 열리고 있는 2018 여자축구 아시안컵 예선전에 출전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태극기 게양과 애국가가 울려 퍼진 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2013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아시아클럽 역도선수권 이후 두 번째다. 그러나 당시는 실내경기장(정주영 체육관)이었고, 이번에는 그들의 ‘성지(聖地)’ 김일성 경기장에서다. 5만 관중을 수용할 수 있는 규모와 경기장 이름에서 보듯 상징성에서 비교 불허다.

북한 관중들도 일제히 기립해 예의를 지켰다. 북한 아나운서는 “대한민국 국가를 연주하겠습니다”라고 안내 방송을 했고, 한국 대표팀 공격수 이금민은 “오늘따라 태극기가 더 크게 보였다”라며 가슴 벅찬 감정을 전했다.

같은 날 비슷한 시각 강릉하키센터에서는 북한의 애국가가 연주되는 가운데 인공기가 게양됐다. 평창올림픽 테스트 이벤트 겸 여자 아이스하키 세계선수권 디비전 2그룹에 출전한 북한이 영국과의 경기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국제아이스하키연맹은 매 경기가 끝나면 승리한 팀의 국기를 내걸고, 국가(國歌)를 틀어준다.

남북 양측의 ‘국가보안법’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가운데 ‘주적(主敵)’ 국가의 애국가라니. 언감생심이다. 하지만 국적과 이념을 초월한 스포츠 행사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국제 스포츠대회라 하더라도 북한이 애국가 연주와 태극기 게양을 흔쾌히 수용한 사례는 거의 없다. 1990년 10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 통일축구대회 땐 태극기대신 한반도기를 앞세우고 입장해야 했다. 2008년 남아공 월드컵 예선 때 남북한이 같은 조에 묶이자 북한은 태극기 게양과 애국가 연주에 난색을 보였고, 결국 국제축구연맹(FIFA)은 제3국인 중국 상하이에서 경기를 치르도록 했다. 월드컵예선은 홈&어웨이 방식으로 경기를 하기 때문에 FIFA는 반드시 상대국의 안방에서 한 게임을 치르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2011년 김정은 집권 이후 북한은 적어도 스포츠 행사에서만큼은 문을 활짝 열고 있다. 북한은 이번 아시안컵 경기도 방북 하는 한국기자들의 신변 안전보장 각서를 써서 만전을 기했다. 나아가 취재를 희망하는 기자들을 모두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혔으나 오히려 통일부에서 제동을 걸었다는 후문이다.

평화 올림픽을 핵심 목표로 내세운 2018 평창 동계올림픽이 10개월 앞으로 다가왔다. 두말할 나위도 없이 차기 정부의 최대 스포츠 이벤트다. 평창올림픽은 북한의 참가, 그 자체만으로도 이미 ‘절반의 성공’이라는 평가다.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에 따른 개성공단 폐쇄로 남북 관계가 최악국면이지만 올림픽을 출구전략 삼아 해빙무드를 되살릴 수가 있다. 실제 스포츠에는 그런 ‘신비한 힘’이 있다. 탁구경기를 통한 미ㆍ중 국교수립이 좋은 예다.

이희범 평창 조직위원장은 "북한이 참가할 권리와 의무가 있다“며 북측을 배려했다. 최문순 강원지사 역시 “북한 고위 관계자로부터 ‘평창 올림픽에 선수단을 파견하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밝혔다. 내년 2월 전 세계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평창에서 태극기와 인공기가 어우러져 물결치는 장면이 벌써부터 기대된다.

최형철 스포츠부장 hcchoi@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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