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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는 희생양 아닌 생존자... 인권을 유린당한 여성으로 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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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안부는 희생양 아닌 생존자... 인권을 유린당한 여성으로 봐야”

입력
2018.07.02 04:40
수정
2018.07.02 09:09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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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허스토리’ 감독 민규동 

 “3년 전 할머니들 많이 별세 

 영화 더 미뤄선 안된다 결심 

 피해자 틀을 벗어나 

 다양한 아픔 보여주고 싶어” 

민규동 감독은 “위안부 소재가 여러 장르에서 다양한 이야기로 만들어져야 한다”며 “‘허스토리’는 시작일 뿐”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민규동 감독은 “위안부 소재가 여러 장르에서 다양한 이야기로 만들어져야 한다”며 “‘허스토리’는 시작일 뿐”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신상순 선임기자

영화 ‘허스토리(Herstory)’ 제목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다. 여성의 시각에서 본 역사, 그리고 그녀(Her)들의 이야기(Story). 민규동 감독은 일본군 위안부라는 가슴 아픈 역사를 극복하는 ‘여성 연대’에 주목하는 동시에 한 개인으로서 여성들이 겪은 각기 다른 사연들을 들려주는 데 충분한 시간과 정성을 들인다. ‘왜 지금 위안부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는가’에 대한 두 가지 답변이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위안부 피해 최초 증언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하는 민 감독이 ‘서양골동양과자점 앤티크’(2008) 이후 10년간 품어 온 주제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일본군 위안부 및 근로정신대 피해자 10명이 1992년부터 6년간 일본 정부를 상대로 법정 투쟁을 벌여 처음으로 일부 승소 판결을 받은 ‘관부재판’을 스크린에 옮겼다. 재판을 이끈 여성사업가 문정숙(김희애)과 위안부 생존자 배정길(김해숙) 박순녀(예수정) 서귀순(문숙) 이옥주(이용녀)의 목소리에 더 많은 관객이 귀 기울였으면 좋겠다.

장편 데뷔작 ‘여고괴담 두번째 이야기’(1999)부터 460만 흥행작 ‘내 아내의 모든 것’(2012)과 사극 ‘간신’(2015)에 이르기까지 꾸준하게 ‘여성’이란 주제에 천착해 온 민 감독의 필모그래피에서 ‘허스토리’는 매우 자연스러우면서도 특별한 선택으로 기억될 듯하다. 영화 개봉(6월 27일)을 앞두고 최근 서울 삼청동의 한 카페에서 민 감독을 만났다.

‘허스토리’의 주연 이용녀(왼쪽부터) 예수정 문숙 김해숙 김희애.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엄청나고도 대단하다. NEW 제공
‘허스토리’의 주연 이용녀(왼쪽부터) 예수정 문숙 김해숙 김희애. 배우들의 연기 앙상블이 엄청나고도 대단하다. NEW 제공
민규동 감독은 “‘허스토리’는 여성이 주체가 되는 여성의 이야기가 돼야 했다”고 말했다.
민규동 감독은 “‘허스토리’는 여성이 주체가 되는 여성의 이야기가 돼야 했다”고 말했다.

 -관부재판을 어떻게 알게 됐나. 

“영화 감독이 된 후로 언젠가 위안부 문제를 영화로 다뤄야 한다는 부채의식을 줄곧 갖고 있었다. ‘앤티크’ 이후에 처음 시도했는데 ‘왜 지금 이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하지 못했다. 그러다 3년 전 할머니들이 많이 돌아가시는 걸 보면서 더는 미뤄선 안 되겠다고 결심했다. 1940년대 사이판으로 끌려간 위안부 소녀 이야기, 아무것도 모른 채 가해자가 된 일본군 이야기, 해방 후 친일청산 과정에서 위안부 문제를 외면한 반민특위 재판 등을 시나리오로 쓰다가 관부재판을 알게 됐다. 일본 도쿄가 아닌 시모노세키라는 지방에서 진행돼 별로 관심을 받지 못했던 재판이다. 시모노세키는 위안부와 근로정신대, 징용당한 이들이 끌려와 흩어진 곳이다. 그 도시의 상징성에 주목하고 끝내 그 재판을 지켜낸 분들의 고집스러움이 영화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극중 문정숙의 실제 모델인 김문숙 한국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회장이 지난달 15일 부산 시사회에 왔다. 

“영화를 이렇게밖에 못 만드냐고 혼날까 걱정했는데 ‘진심으로 감사하다’고 말씀하시며 저와 배우들을 안아 주셨다. 울지 않을 수 없었다. 객석도 눈물바다가 됐다. 올해 93세라 몸은 많이 약해졌지만 마이크를 들고 관객 앞에 선 모습은 여전히 전사 같았다. 김문숙 회장은 내 마음 속 첫 번째 관객이다.”

 -생생한 에피소드를 보면서 얼마나 철저하게 자료 조사를 했는지 느껴졌다. 

“당시 일본 후원회가 재판 때마다 소식지를 만들어 배포했다. 할머니가 차 안에 들어온 벌에 쏘인 이야기부터 뒤풀이 사진과 차비 영수증까지 꼼꼼하게 기록했더라. 김문숙 회장이 쓴 수필집에도 할머니들의 투숙을 거부한 일본 여관에 혼수 이불을 가져간 일화와 할머니들이 차 안에서 일본 군가를 부르는 모습에 아이러니한 감정을 느낀 일화 등이 실려 있다. 구체적인 사실들을 각색해서 영화에 반영했다.”

지난달 15일 ‘허스토리’ 부산 시사회에 참석한 김문숙 한국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 이날 김 회장을 처음 만난 배우 김희애와 김해숙은 눈물을 흘렸다. NEW 제공
지난달 15일 ‘허스토리’ 부산 시사회에 참석한 김문숙 한국정신대문제대책 부산협의회 회장(왼쪽에서 두 번째). 이날 김 회장을 처음 만난 배우 김희애와 김해숙은 눈물을 흘렸다. NEW 제공

 -위안부 투쟁 초기에 겪은 어려움에 주목한 이유는. 

“과거사를 다루지만 메시지는 현재를 넘어 미래로 향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50년간 위안부 피해 사실을 숨기게 만든 국가와, 할머니들에게 수치심과 죄책감을 강요한 우리 사회에 대한 자성 없이 진정한 이해와 지지는 불가능하다고 본다. 문정숙도 처음엔 남의 일이라고 여기다가 할머니를 비난하는 택시기사를 보면서 각성을 하지 않나. 거기서부터 변화가 시작된다. 할머니들이 자신을 숨기고 자책할 때는 비난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하지만 할머니들이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자 지지와 응원이 따랐다. 그 상대적 맥락을 중요하게 다루고 싶었다.”

 -그래서 주인공들이 울지 않는 것인가. 법정에서 당당하게 증언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감정이입을 무기로 관객을 울려서 얻어낼 수 있는 게 없다. 아프고 슬픈 감정에 매몰되면 무엇이 진정한 연대이고 승리인지 메시지가 가려질 것 같았다. 조금 다른 감상법을 관객에게 보여 주려 했다. 눈물이 차오를 때 오히려 냉정해질 수도 있는 거다.”

 -배우들은 복받치는 감정을 억눌러야 해서 힘들었다고 하더라. 

“특히 김해숙 배우가 힘들어했다. 긴 세월 고통스러웠던 위안부 할머니들의 삶에 깊이 몰입해서 촬영만 끝나면 펑펑 울었다. 그 눈물이 쌓여 6개월간 우울증도 겪었고. 관객을 만나야 그 감정이 해소될 것 같다.”

재판 장면에 대해 상의하는 민규동 감독(왼쪽)과 배우 김희애. NEW 제공
재판 장면에 대해 상의하는 민규동 감독(왼쪽)과 배우 김희애. NEW 제공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여성 연대를 그린 영화로도 읽힌다. 지나친 단순화일지 모르지만, 여성 케이퍼 무비인 ‘오션스8’보다 활약상이 멋있게 다가오더라. 

“영화를 시작할 때 농담처럼 ‘오션스11’ 프로젝트라고 부르기도 했다. 원고 10명과 단장 1명이 바다를 가로지르며 재판하는 이야기이니까(웃음). 이 영화에서 여성이 화두인 건, 수많은 남성 영화에 대한 반사적 액션이 아니다. 위안부 할머니들은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희생양’으로 표상화되고, 가부장적 시선에서 ‘짓밟힌 처녀’라 불렸다. 박물관에 갇힌 박제처럼 굳어진 그 상이 사람들을 위안부 문제에서 더 멀어지게 만든다고 생각한다. 개별 여성마다 겪은 아픔은 다양하고 차별적이다. 다양한 생존자의 상을 보여주기 위해서는 출발점이 ‘여성’이어야 한다고 봤다. 할머니들에겐 피해자가 아닌 생존자라는 각성이 대단히 중요한 위로다. 그 각성은 할머니들을 인권을 유린당한 여성으로 바라봐야 가능하다.”

 -주제를 다루는 시선과 태도에서 조심스러움이 느껴진다. 

“위안부 문제는 아시아의 홀로코스트인데 그에 비해 충분하게 다뤄지지 못했다. 이제 시작인 셈이다. 하나의 소재에서 얼마나 다양한 영화가 나오느냐가 진정한 진화이자 진보다. 이 영화가 다음에 나올 위안부 소재 영화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시선의 확장을 고심했다.”

 -10대도 보는 영화라 역사 의식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을 텐데. 

“첫째 딸 아이가 지금 열다섯 살인데 3년 전 포털사이트에 웹소설을 연재했다. 수업 시간에 위안부 문제를 듣고는 분노한 나머지 소설로 쓰겠다고 덤빈 거다. 4회 연재됐을 때 댓글이 하나 달렸다. ‘공부 좀 하고 써야 할 거 같다’고. 그때 깨달음을 얻고 ‘더 공부하고 돌아오겠다’면서 연재를 중단했다. 당시 초등학생인 아이에게도 위안부 문제에 대한 궁금증이 있고 표현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는데 우리가 이 문제를 너무 몰랐구나 싶더라. 내가 영화를 만든다면 아이들 세대가 제대로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딸과도 약속했다.”

 -영화 안에서 소수자와 여성에 꾸준히 관심을 두는 이유는. 

“더 행복한 사회가 될 수 있었던 순간마다 못된 정치 권력이 우리를 짓눌렀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 약자인 소수자라고 생각한다. 사회 모순과 부조리에 힘들어하는 사람을 통해 더 나은 세상을 꿈꾸는 건 영화 감독으로서 자연스러운 욕망이다.”

 -차기작 준비는. 

“몇 가지 써놓은 이야기는 있지만 아직 고르지는 않았다. 그동안 만들어 온 영화의 장르와 소재가 워낙 들쭉날쭉해서 언제쯤 나만의 일관된 스타일을 찾아갈까 궁금하다. 매 작품마다 데뷔작 같은 마음가짐으로 영화를 만들 수 있었으면 좋겠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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