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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포커스] 세상과 웃고 울었다... 촛불이 밝힌 음악의 가치

입력
2017.03.14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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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말아요 그대’ 떼창

“대중이 힘들 때 달래주고 싶어”

전인권, 3차례나 촛불서 공연

시민들이 따라 부를 땐 ‘전율’

*사회적 역할 고민한 음악인들

K팝에 밀려 멀어진 대중음악

광장서 울려 퍼지며 생명력 얻어

솔로ㆍ밴드 등 100여팀 무대 올라

"아이고, 잡혀 가면 어쩌려고 저기(촛불집회)에 섰어요?" 가수 전인권을 알아 본 백발의 택시 운전기사가 한 말이다.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 공연을 끝내고 이동하는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다. "제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요." 전인권은 웃으며 택시 기사의 말을 받았다. 김종진 인턴기자
"아이고, 잡혀 가면 어쩌려고 저기(촛불집회)에 섰어요?" 가수 전인권을 알아 본 백발의 택시 운전기사가 한 말이다. 11일 오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린 촛불집회 공연을 끝내고 이동하는 자리에서 벌어진 일이다. "제가 살면 얼마나 산다고요." 전인권은 웃으며 택시 기사의 말을 받았다. 김종진 인턴기자

전인권이 엔딩곡으로 ‘돌고 돌고 돌고’ 부른 이유

20주 동안 매주 토요일 서울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촛불집회 공연을 꾸린 김지호 박근혜정권 퇴진 비상국민행동(퇴진행동) 프로듀서는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로 지난해 11월 가수 전인권이 ‘걱정 말아요 그대’(2004)를 부른 순간을 꼽았다. “광장에서 울려 퍼진 따라 부르기의 전율을 잊을 수 없다”며 한 말이다.

“그대는 너무 힘든 일이 많았죠.”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하루 뒤인 지난 11일 오후 10시 광화문 광장. 전인권은 마지막 정기 촛불집회의 공연에서 통기타를 치며 ‘걱정 말아요, 그대’를 또 한 번 불렀다. 세월의 풍파를 겪고 머리카락이 하얗게 센 가수가 갈라진 목소리로 건넨 위로에 시민들은 촛불을 들고 “지나 간 것은 지나간 대로”라며 노래를 이었다.

무대에서 내려온 직후 한국일보와 만난 전인권은 “‘걱정말아요 그대’는 내가 굉장히 힘들 때 만든 곡”이라며 “난 대중 가수이고, 대중이 힘들 때 그 슬픔을 달래주고 싶어 이 노래를 불렀다”고 말했다. ‘걱정 말아요 그대’는 전인권이 아내와 이혼한 뒤 우울증에 빠져 정신병원에서 치료를 받을 때 “나를 찾기 위해” 만든 노래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를 추모하는 노란색 리본을 왼쪽 가슴에 달고 무대에 오른 전인권은 마지막 곡으로 ‘돌고 돌고 돌고’(1988)를 불렀다. 촛불로 새 시대를 연 시민에 바치는 뜨거운 찬가였다.

“록 음악 페스티벌에서 ‘돌고 돌고 돌고’를 선곡하고 ‘해가 뜨고 해가 지면’으로 노래를 시작하면, 모든 관객들이 제 노래인 것처럼 따라 불러요. 시민이 주인공이 될 수 있는 노래로 촛불집회 공연을 끝내고 싶었어요. 이번 촛불집회의 주인공이 바로 그들이니까.”

20주 동안 서울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선 음악인들. 이은미(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으로), DJ DOC, 이승환, 조PD 등이 거리에 나와 시민들과 호흡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20주 동안 서울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열린 촛불집회에 선 음악인들. 이은미(왼쪽 위부터 시계 방향 으로), DJ DOC, 이승환, 조PD 등이 거리에 나와 시민들과 호흡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가수의 사회적 의사 표현 금지’ 신화 깬 촛불집회

촛불집회는 사회와 공존하는 대중음악의 가치를 일깨운 장이었다. 아이돌을 앞세운 K팝으로 가장 화려한 시절을 보내고 있는 듯 하지만,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대중음악이 세상에 뿌리 내릴 때 어떤 힘을 낼 수 있는 지를 보여줬다. 가수 양희은의 ‘아침이슬’(1971)은 45년 만에 다시 광장에 흐르며 활력을 얻었고, 두 번이나 거리에 울려 퍼진 한영애의 ‘조율’(1992)은 촛불집회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 노래가 됐다. 가수가 TV 밖으로 나와 거리에서 시민들과 시대의 목소리를 공유할 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문화 상품’이 아닌 예술로서의 가치다. 광화문 광장에서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을 보고 노래를 알았다며 ‘걱정 말아요 그대’를 따라 부르던 이원석(17)군은 “가수가 사회적인 장소(촛불집회)에서 음악과 접점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게 신기했고, 뭉클했다”고 말했다.

촛불집회는 음악인들에 사회적 역할을 고민하게 한 계기였다. 지난해 11월 촛불집회 무대에 선 가수 이승환은 “음악인은 세상과 함께 울고 웃을 수 있어야 하지 않나”라며 “음악인의 사회적 역할과 책무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됐다”고 밝혔다. 그와 같은 달 거리로 나와 시민들과 호흡한 밴드 아시안체어샷의 기타리스트 손희남은 “촛불집회 공연 후 건강음료와 1,000원짜리 지폐 몇 장을 쥐어주시던 시민을 잊지 못한다”며 “시대를 반영하고 호흡하는 음악의 중요성을 다시 고민하게 됐다”고 말했다.

촛불집회는 음악이 정치 혹은 사회적인 이슈와 거리를 둬야 한다는 ‘예술의 가치중립 신화’를 깨는 방아쇠 역할도 했다. 그간 사회적인 이슈에 목소리를 내지 않던 음악인들까지 무대에 올라 촛불에 힘을 보탠 것은 이례적인 풍경이었다.

밴드 두 번째 달 기타리스트인 김현보(사진 위)는 헤어롤을 머리에 감고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을 패러디했고, 가수 이은미는 무대 밖에서 허리를 숙이며 모금을 했다.
밴드 두 번째 달 기타리스트인 김현보(사진 위)는 헤어롤을 머리에 감고 이정미 헌법재판소장 권한대행을 패러디했고, 가수 이은미는 무대 밖에서 허리를 숙이며 모금을 했다.

핫팩 나눠 준 이은미, ‘007 작전’ 편 양희은

촛불집회에는 DJ DOC, 이상은, 장필순 등을 비롯해 조 PD와 가리온 등 힙합 가수들과 브로콜리 너마저, 단편선과 선원들 같은 인디 밴드 등 장르를 초월한 100여 팀이 무대에 올랐다. 재미있는 일도 많았다. 국악과 해외 전통 음악을 버무린 음악으로 인기를 얻고 있는 밴드 두 번째 달의 기타리스트 김현보는 11일 공연에서 앞머리에 분홍색 헤어롤 두 개를 말고 나와 진행자를 깜짝 놀라게 했다. 대통령 탄핵 심판 선고 당일 뒷머리에 헤어롤을 달고 출근하던 이정미 헌재소장 권한대행의 출근길 모습에 대한 패러디였다. 김현보는 공연 후 기자와 만나 “탄핵 인용 결정을 잘 내린 헌재에 대한 감사의 의미”라며 웃었다.

가수 이은미는 무대 아래서 촛불집회 자원봉사를 자처했다. 퇴진행동 공연 연출팀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은미는 광화문 일대에서 시민들에게 핫팩을 나눠주고, 행사 진행 관련 시민 모금에도 발 벗고 나섰다.

이승환은 ‘촛불집회 홍보대사’였다. 김지호 퇴진행동 프로듀서는 “이승환이 촛불집회 시간 등을 몇 차례 물어보기에 왜 그러나 싶었다”며 “자신의 소속사 건물에 건 ‘박근혜 하야 현수막’에 고지할 목적이란 걸 뒤늦게 알았다”며 웃었다. 양희은은 사전에 출연 사실을 알리지 않고 촛불집회 무대에 서 시민을 놀라게 했는데, 연출 팀이 당일까지 보안을 지키느라 애를 먹었다. 촛불집회 공연에 나선 가수들은 출연료를 한 푼도 받지 않았다. 대형 아이돌 기획사 소속 A 가수의 섭외도 논의됐으나, 기획사가 난색을 표해 무산되기도 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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