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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갈등리포트] 재개발 청신호 들려오지만… 판자촌 주민들 불안감 고조

입력
2017.05.30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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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리지 않는 재정착 문제

주민 60% 월소득 100만원 이하

대부분 노인이라 취업도 힘들고

쓰레기 방치 등 환경 갈수록 열악

반발 여전한 재개발 방식

SH, 토지 100% 수용 개발 계획

“개발비용 빼고 땅 일부 돌려줘야”

토지주들은 市 상대로 행정소송

23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주민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지후 기자
23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에서 주민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신지후 기자

23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한 켠. 70, 80대 노인 서너명이 둘러앉아 내년 착공 예정인 재개발 얘기에 한창이었다. 마을에 정착한 지 20년이 넘었다는 이들은 대체로 가족과 지인 없이 이웃 주민들을 친구 삼아 살아가는 기초생활수급자다. 얇은 판자로 벽면과 지붕을 겨우 이어 붙인 10㎡ 남짓 공간에서 의식주를 모두 해결한다.

서울시가 내년부터 본격화하겠다는 주민 이주를 두고 이들은 불안감이 상당한 듯했다. 박모(80)씨는 “서울시나 강남구 공무원들이 찾아와 이주 계획 등을 묻곤 하지만 눈 앞이 깜깜한 상태”라며 “나라에서 나오는 30만원 가량의 기초생활수급비로 전기세와 수도세, 식비를 해결하고 나면 3만~5만원 남짓 남는데 이곳을 떠나면 몸 뉘일 곳 있겠느냐”고 말했다.

2020년 아파트촌으로 바뀌는 구룡마을

구룡마을은 1980년대 서울 아시안게임과 올림픽을 전후로 강남지역 개발이 본격화하면서 도심에서 밀려난 영세민들이 꾸린 무허가 판자촌이다. 전체 면적은 26만6,304㎡로 축구장 37개가 넘는 크기다. 2010년쯤 개발 논의가 시작되고 각종 이해관계가 얽히며 국내 판자촌 재개발 갈등의 상징적 장소가 됐다. 1990년대 후반 한때 3,000여가구가 살 정도로 북적이던 마을에는 5월 기준 970세대가 살고 있다.

서울시와 강남구, 서울주택도시공사(SH공사) 등은 현재 거주민과 토지주 보상을 위한 토지측량과 물건조사를 실시하고 있다. 올해 보상 및 실시계획인가를 완료하고 내년 착공해 2020년말까지 사업을 완료하겠다는 방침이다. 구룡마을은 앞으로 주거용지 12만1,165㎡(45.5%), 도시기반시설용지 13만4,461㎡(50.5%), 기타시설용지 1만678㎡(4%)로 재탄생하게 된다. 주거용지에는 아파트와 주상복합 2,692가구가 들어선다.

23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주택 벽면에 주민 이주신청과 지역 조사를 알리는 공지문이 붙어 있다. 신지후 기자
23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주택 벽면에 주민 이주신청과 지역 조사를 알리는 공지문이 붙어 있다. 신지후 기자

주민 “임시주택 월세 감당 어떻게”

올 들어 ‘구룡마을 개발 청신호’ 이야기가 자주 들려오지만 갈등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가장 심각한 것은 ‘주민 재정착’이다. 서울시는 개발되는 아파트를 주민에게 특별공급하는 것은 ‘절대 불가’라는 입장인 대신, 임대아파트를 건설해 이들에게 우선 입주권을 주기로 했다. 특히 서울시와 SH공사는 구룡마을을 분양단지 3곳, 임대단지 3곳으로 구분해 개발할 계획이었으나, 이 중 SH공사가 직접 개발하는 4개 단지 내에는 60㎡ 이하 크기의 공공임대가구와 공공분양가구를 혼합 배치하기로 결정했다.

서울시의 대책에도 주민들의 하소연은 여전하다. 임대주택 입주권을 받는다 해도 2,000만원 안팎으로 예상되는 보증금과 7만~20만원 수준의 월세 모두 감당이 쉽지 않다. 주민 중 60% 가까이가 월 소득 100만원 이하 계층이고 대부분이 60~90대 노인이어서 일자리를 구하기도 쉽지 않다. 주민 오모(93)씨는 “당장 전기세 4만원도 내기 힘든 상황에서 임대주택으로 들어가면 월세 감당은 어찌하라는 것이냐”며 “이주 계획을 세우려면 몇 가지 선택할 수 있는 방안이 있어야 하는데 전혀 없다”고 토로했다.

SH공사는 구룡마을 어귀에 ‘구룡마을보상 현장사무실’을 차려놓고 임시이주신청을 접수하고 보상관련 상담을 해주고 있다. 마을 곳곳엔 ‘주민재정착을 위한 설문조사에 참여해달라’ ‘주민 협의체 참여인이 돼 달라’는 개발사업 관련 공지문도 붙어 있다. 하지만 주민 참여는 저조하다. 지나는 주민 누구 하나 눈길조차 제대로 주지 않는다.

최근에는 당국과 SH공사의 주민 전수 조사(가구 수, 소득, 생활비 등)가 본격화하면서 주민 불안감은 커지고 있다. 다수 주민들은 “조사가 끝나면 주민을 내쫓기 시작하는 것 아니냐”며 응답을 거부하고 있다. 안모(75)씨는 “벌써 서울시나 SH공사에서 몇 번이나 다녀갔는데 조사 직후 본격적으로 터전을 빼앗을까 불안한 마음 뿐”이라며 “80세 넘은 남편이 몇 달 전부터 빈병과 폐지를 모아 돈을 벌고는 있지만 구룡마을이 아니면 생활비를 감당하긴 힘들다”고 토로했다.

주거환경은 갈수록 열악해지고 있다. 건물을 구성하고 있는 판자와 비닐은 낡을 대로 낡아 점차 형태를 잃어가고, 길거리에는 빈집에서 나온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다. 지난 3월말 화마가 덮친 마을 7B 지구에는 새까맣게 타버린 주택과 생활용품 등이 그대로 널려있었지만, 구역 인근 주민들은 화재 현장 바로 옆에 텃밭을 꾸려 생활을 이어가는 실정이다.

올해 초 화마가 휩쓴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7B지구의 23일 모습. 새까맣게 그을린 자재들이 쌓여있지만, 주민들은 이곳 인근에 텃밭(오른쪽)을 꾸려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 신지후 기자
올해 초 화마가 휩쓴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7B지구의 23일 모습. 새까맣게 그을린 자재들이 쌓여있지만, 주민들은 이곳 인근에 텃밭(오른쪽)을 꾸려 끼니를 해결하고 있다. 신지후 기자

토지주 “공영개발 방식 반대”

사업 방식을 두고 토지주와 당국간 갈등 또한 여전하다.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는 지난해 11월 구룡마을 도시개발사업 구역지정 및 개발계획을 통과시키면서 SH공사가 주도하는 ‘100% 수용ㆍ사용방식’을 확정했다. 즉, SH공사가 거주민과 토지주들에게 보상가를 지불하고 구룡마을 모든 토지를 수용해 개발한 뒤 사업이익도 가져가는 방식이다.

당초 서울시는 2012년 8월 ‘미분할 혼용방식(일부 환지 방식)’으로 도시개발사업 계획을 발표했다. 하지만 강남구가 “사업시행자가 토지를 수용해 개발한 뒤 개발한 토지 일부를 다시 원래 토지주에게 돌려주는 환지 방식을 택하면 개발이익을 둘러싸고 또 다른 특혜 논란이 빚어질 수 있다”며 반발했고, 이에 서울시가 한 발 물러선 것이다.

일부 토지주들은 이 같은 사업 방식이 부당하다는 입장이다. 토지주들은 길게는 20년 가까이 세금을 부담했지만, 개발 이익은 물론 재산권마저 제대로 행사할 수 없는 처지에 놓였다고 설명한다. 토지주 이모(69)씨는 “20년 전 3.3㎡당 304만원에 땅을 거래했는데 당국은 현재 보상가를 평당 300만원 수준으로 책정하고 있다”며 “길 건너 아파트들은 3.3㎡당 4,500만원을 오간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현실과 너무 동떨어진 수치”라고 말했다.

토지주들은 ‘일부 환지’ 방식으로 사업 계획을 수정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구룡마을 소규모 토지주 40여명은 ‘구룡마을공동체협동조합’을 꾸려 당국과 협상을 시도하고 있는데, 이들은 “우리가 소유한 땅 중 개발비용 분을 제외한 절반이라도 돌려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창수 구룡마을공동체협동조합 총무이사는 “구룡마을 재개발 시 토지개발이익만 3,075억원으로 예상되는데 당국은 이 중 대부분을 주민 재정착에 투자하고 투자자들은 나 몰라라 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토지주들은 “서울시의 도시개발구역지정 및 개발계획 고시는 재량권 남용에 의해 탄생한 것은 물론 절차적 하자가 있다”며 서울시를 상대로 최근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구룡마을 재개발 추진 일지
구룡마을 재개발 추진 일지

서울시 “개발이익 주민 재정착에 이용”

서울시는 주민들의 편의를 최우선으로 두고 재개발 사업을 진행하겠다는 방침이다. 거주민 전수조사를 통해 소득 수준을 파악, 소득에 맞게 보증금이나 월세 등을 차등 지원하고 구룡마을 개발이익의 상당부분을 주민 복지와 자립에 투자한다는 것이다. 서울시는 구룡마을 주민과 새로운 입주자들 간 융화를 위해 마을카페, 텃밭, 도서관, 체육시설 등 공동이용 시설을 마련해 마을 공동체가 성장할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할 계획도 세웠다.

그러나 토지주들의 ‘사업계획 수정’ 요구는 수용하기 힘들다는 입장이다. 서울시 도시계획위원회 관계자는 “사업계획 고시가 내려지고 이에 따른 조사, 평가 작업이 본격 시작된 상황에서 일부 환지 방식으로의 수정은 어렵다”며 “다만 서울시에서 관련 민원과 의견은 적극 듣고 정책에 반영한다는 입장인 만큼 절충안 마련을 위한 움직임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23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너머로 고층 아파트가 보이고 있다. 신지후 기자
23일 오후 서울 강남구 개포동 구룡마을 너머로 고층 아파트가 보이고 있다. 신지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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