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딸이냐 지도냐’ 가슴 울리고… 조선팔도 풍광은 가슴 녹인다

입력
2016.08.30 18:17
0 0

‘아름다운 이 땅에 금수강산에’로 시작하는 동요 ‘한국을 빛낸 100명의 위인들’ 가사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5,000년 역사에서 솟은 준봉 중 하나인 인물이라지만 당대엔 공로를 인정받기는커녕 무고에 몰렸다. 지도를 그렸다는 이유, 그것도 국가의 허락 없이 세세히 정확하게도 지도를 그렸다는 이유로 죽음 문턱까지 갔다. 부정확한 지도 때문에 어이없이 비명횡사한 아버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지도에 대한 집착을 불렀고, 먼 길 떠나는 백성이 편히 다닐 수 있도록 하고 싶은 애민이 그의 신념을 키웠다.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고산자’)는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인물, 하지만 제대로 알고 있지 못하는 조선 후기의 위인 김정호를 다룬다. ‘고산자’는 30일 오후 서울 성동구 한 멀티플렉스에서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첫 선을 보였다.

추석 대목을 겨냥한 영화인만큼 진용은 화려하다. ‘실미도’와 ‘공공의 적’ 시리즈 등으로 충무로 흥행술사라는 별칭을 얻었던 강우석 감독이 메가폰을 잡았고, 예능프로그램 ‘삼시세끼 어촌편’으로 중년의 매력을 발산해온 차승원이 김정호를 연기했다. 김정호의 딸 순실 역의 남지현, 흥선대원군을 연기한 유준상, 김정호를 돕는 조각장이 바우를 맡은 김인권 등 조연급도 무게가 있다. 마라도에서 백두산 천지까지 9개월 동안 한반도의 사계를 담은 영화의 덩치도 큼직하다.

영화는 지도에 미친 김정호를 스크린 중앙에 놓는다. 조선팔도를 돌아다니며 미친 듯이 지도를 만들어가는 김정호의 삶이 전반부를 차지한다. 3년 반 동안 거지처럼 세상을 떠돌다 돌아와 유일한 혈육인 딸의 얼굴도 못 알아보는 김정호의 집념, 외척의 세도를 밀어내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흥선대원군의 야심이 서로 엇갈리면서 영화는 조선 후기의 혼란스러운 시대상을 스크린에 그려낸다. 김정호의 지도를 두고 흥선대원군과 세도가들이 대립하면서 김정호는 얄궂은 역사의 회오리에 휘말린다. 순실이 천주학에 빠지면서 김정호를 덮친 회오리는 더 거세진다. 영화는 갖은 역경과 고난 속에서도 자신의 지도와 신념을 지키려 했던 김정호의 인고를 스크린에 새긴다.

영화적 꼼수 없는 우직한 전개

감정 폭발하는 결말에 힘 실어

설득력 약한 정치적 희생양 설정

아재개그 대사 호불호 갈릴 수도

한국화 담은 듯한 영상미 ‘압권’

★다섯 개 만점 기준, ☆는 반 개.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차승원을 붓 삼아 김정호의 빛나는 삶을 돌아본다. CJ엔터테인먼트
영화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차승원을 붓 삼아 김정호의 빛나는 삶을 돌아본다. CJ엔터테인먼트

우직하게 마음을 움직인다

역사 속 인물은 대중의 호기심을 끌기 어렵다. 더군다나 왕궁 비사에 얽힌 비극적인 왕족이 아니라면 흥미는 떨어지기 마련. 김정호를 소재로 삼은 영화는 흥행에 대한 위험도가 높을 수밖에 없다. 박범신 작가의 소설 ‘고산자’를 스크린에 옮긴 강 감독의 승부사 기질이 엿보인다.

영화는 소재의 성격에 맞춰 강 감독답게 직진으로 내달린다. 영화적 꼼수는 마치 위인에 대한 결례라도 된다는 듯 우직하게 이야기를 밀어붙인다. 흥선대원군이 양인과 왜인에게 지도를 넘기려는 것 아니냐고 윽박지르자 김정호가 “제 나라 백성을 못 믿으면 누굴 믿습니까”라고 반문하는 대목 등 지나치다 싶은 직설적인 화법이 초반부엔 부담스럽다. 차승원의 대사에 ‘삼시세끼’를 녹이거나, 지도를 내비게이션에 비유하는 장면 등은 애교 섞인 유머이긴 한데 좀 썰렁하다.

하지만 영화는 후반에 접어들며 관객을 감정의 골로 몰아 넣는다. 딸의 목숨과 지도를 바꿔야 할 상황에 처해 고뇌하다가 결국 참담한 결과를 맞게 되는 김정호의 서러운 운명이 가슴을 친다. 영화 절정부에서 터져 나오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라는 외침은 이 영화가 왜 그토록 우직한 방법을 고수했는지 깨닫게 한다.

라제기 기자 wenders@hankookilbo.com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마라도에서 백두산까지 한반도의 사계를 담았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마라도에서 백두산까지 한반도의 사계를 담았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강우석이 그려내는 한 폭 한국화

걷고 또 걷는다. “아직 못 가 본 길이 갈 길”이라며 기약 없이 발을 내딛는 이는 대동여지도를 만든 ‘지도쟁이’ 김정호다. ‘전설의 주먹’(2012) 이후 4년 만에 컴백한 강 감독은 김정호의 삶을 더듬었다.

평민 출신이라는 이유로 위대한 성과를 남기고도 홀대받아야 했던 김정호의 삶은 오히려 영화화하기에 매력적인 소재였을지 모른다. 우리가 알 만한 김정호와 관련된 역사적 사건이 없으니 감독의 상상력은 무한대로 뻗어나갈 수 있기에. 위인에 대해 모른다는 건 창작자에게 약이 될 수도, 혹은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강 감독은 대중적인 배우 차승원을 대동해 생경한 인물 김정호를 관객에게 설득시킨다. 그렇다고 다큐멘터리식의 인물 재조명은 아니다. 해학과 풍자를 아는 인간 김정호를 그려낸다. 분명 시대극인데 차승원이 하는 대사가 일상 속 ‘아재개그’를 읊조리듯 익숙해 그리 무겁지만은 않다. 하지만 흥선대원군과 안동 김씨 문중 간의 대립을 내세워 김정호에게 해를 가한다는 이야기 기둥은 설득력이 약하다. 오랜 인고로 빚어낸 영상미는 입을 딱 벌어지게 한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와 ‘취화선’에서 봤던 한 폭의 한국화가 ‘고산자’에서도 시작과 끝을 장식한다. 강 감독은 이것만으로도 영화사에서 김정호에 버금가는 역할을 해냈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조각장이 바우(오른쪽) 등을 동원해 김정호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복원하려 한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고산자 대동여지도'는 조각장이 바우(오른쪽) 등을 동원해 김정호의 알려지지 않은 삶을 복원하려 한다. CJ엔터테인먼트 제공

지도에 미친 남자 시대정신을 말하다

불광불급(不狂不及). 미친 듯이 몰두하지 않고는 어떤 일도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고산자’는 일생을 지도 제작에 바친, 그래서 끝내 어떠한 경지에 이른 한 미치광이에 대한 영화다. 요즘 말로 하면 ‘지도 덕후’쯤 될 텐데, 그 미치광이의 미친 짓에 어느새 가슴이 뛴다.

잘못 만들어진 지도처럼 부실한 국가 시스템이 무고한 백성을 사지로 내몰고, 정보를 틀어쥐고 통제하는 이들이 권력을 누리는 건, 김정호가 살았던 조선 말기나 지금이나 달라진 게 없다. 자신이 만든 지도임에도 백성의 것이라 말하는 김정호에게서 지금 이 시대를 비추는 고결한 시대정신을 읽는다.

김정호와 순실, 바우가 서로 보듬고 때론 투닥거리며 살아가는 평범한 일상 풍경은 정겹지만 조금 지루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소소한 코믹 대사들이 튀지 않고 극에 스며든다. 결말로 향하면서 차곡차곡 쌓인 감정들이 힘있게 폭발하는데, 극장 밖을 나선 뒤에도 먹먹한 여운이 길게 남는다. 지도를 탐했던 이들조차 그 경이로움에 말문이 막히고 말았던, 한 인간의 순수한 열망과 위대한 집념을 통해 정신이 정화되는 듯한 감흥을 받는다.

영화에 담긴 이 땅의 풍광은 너무나 아름다워서 눈물이 난다. 특히 구름 걷힌 백두산 천지의 물빛과 하늘빛은 그야말로 압권이다.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