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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하얀 깃털

입력
2017.10.22 14:45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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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얼굴에 살짝 당황한 기색이 지나간다. 앞에 서 있는 이 여자가 당신의 딸은 분명한데, 이름이 가물가물하거나, 아니면 몇째 딸인지 흐릿한 거다. 그러고 보니 어머니 아버지 얼굴 본 지도 거의 한 달이 지났다. 나는 짐짓 장난스럽게 물어본다. “아빠, 제가 몇 째게요?” 아버지는 부끄러운 듯 미소를 지으면서 대답한다. “셋째, 아니면 넷째인데...” 나도 웃으면서 맞장구를 친다. “맞아요, 저 넷째에요. 넷째 희령이.” 그러자 아버지는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듯 만족스럽게 웃는다. “그래, 그래. 내가 알지.” 나는 문득 아들이 하나밖에 없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자식이 여섯이나 되면 나도 아버지 나이에 그 이름과 순서를 만날 헷갈릴 것 같다.

언니들과 부모님 모시고 여행을 가는 날이다. 차를 타고 달리면서 모두들 가족여행의 옛 기억을 되살린다. 미국에 살면서 잠시 귀국한 셋째 언니가 아버지와 튜브를 타고 경포대 앞 바위섬까지 헤엄쳐 갔던 적이 있다고 말한다. “설마, 그게 가능한 일이야? 언니가 상상한 거 아니야?” 넷째라서, 차에 탈 자리가 없어서, 그 여행에서 제외되었던 내가 되묻는다. “진짜야. 아빠가 나만 튜브에 태워줘서 기억해. 내가 아빠에게 중요한 딸이 된 기분이었거든.” 중요한 딸! 차 안에 있던 딸들이 모두 웃는다. 여섯이나 되는 자매들 틈에 끼어서 자라다 보면 늘 ‘중요한 딸’의 자리가 고프고, 목마르다. 맏딸이나 막내로 태어났으면 조금 덜 절박했을지도 모른다. 아들도 아닌 둘째 셋째 넷째 다섯째 딸은 운명적으로 덜 중요한 자식들인 것이다.

경포대에 도착한다. 언니들과 나는 바다 위에 떠 있는 바위섬들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오, 저 정도면 튜브 타고 갈 수 있었겠네. 우리는 또 웃음을 터뜨린다. 덩달아 함께 미소 짓던 아버지가 주춤주춤 바다를 향해 걸어간다. 아버지 고향은 원산이다. 드물게 떠났던 가족여행은 거의 동쪽 바닷가에 다녀오는 일이었다. 새벽에 일어나 졸린 눈을 비비며 어딘지도 모르는 곳을 향해 달려가던 기억이 떠오른다. 고만고만한 딸들을 차에 태우고 달리다가 어둠 속에서 희뿌옇게 길들이 밝아올 때, 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바닷가를 거슬러 올라가면 반드시 있겠지만,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고향이 그리웠을까.

물 빛깔이 하도 예뻐 사진을 찍으려고 나도 아버지 뒤를 따라간다. 아버지는 바다를 한참 바라보다가 허리를 굽혀 모래밭에서 무엇인가를 줍는다. 조개껍질들인가. 카메라를 보라고 아버지를 부르자, 허리를 펴고 손을 흔든다. 다시 주춤주춤 나에게 다가온 아버지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건네준다. 하얀 깃털이다.

손바닥 위에 놓인 깃털 두 개를 보면서 나는 어리둥절해진다. 이건 뭔가. 내가 이 사람의 딸인가, 어머니인가. 아니다, 그게 아니다. 이건 그냥 한 동네 사는 개구쟁이 꼬마가 바닷가에서 주운 신기한 사물을 지나가던 아주머니에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어리숙한 할아버지와 애매한 아주머니가 아무 사연도 인연도 없는 시공간에서 마주 보고 미소를 짓고 있는 장면이기도 하다. 나는 문득 깨닫는다. 이제 이 사람과 나 사이에는 아버지와 딸이라는, 끈끈하면서 동시에 이리저리 꼬이고 비틀린 인연들이 많이 걷혔구나. 좋지 않은가, 사랑에 배고프고 목마르지 않은 무덤덤함이, 누가 더 중요하지도 덜 중요하지 않지도 않은 홀가분함이, 이 무심한 선량함이.

여름을 떠나 보낸 바다는 앓고 난 뒤끝처럼 청명하고 텅 빈 느낌이다. 갈매기들이 오락가락 날아다니는 바다를 뒤로 하고 떠난다. 모래밭 어딘가에 아버지가 건네 준 하얀 깃털을 두고 와야 할 것 같다. 그러나 차마 버리지 못하고, 나는 그것을 슬그머니 주머니에 넣는다.

부희령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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