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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제 언어를 가진 작가...자기 언어를 찾아가는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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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제 언어를 가진 작가...자기 언어를 찾아가는 작가

입력
2017.09.0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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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 작가 이승우가 소설집 '모르는 사람들'을 냈다. 데뷔이래 줄곧 화두였던 인간 실존의 문제, 성과 속의 이원성 극복, 초월자와 인간의 괴리를 소재로 이어간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중견 작가 이승우가 소설집 '모르는 사람들'을 냈다. 데뷔이래 줄곧 화두였던 인간 실존의 문제, 성과 속의 이원성 극복, 초월자와 인간의 괴리를 소재로 이어간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모르는 사람들

이승우 지음

문학동네 발행ㆍ248쪽ㆍ1만3,000원

수림

백민석 지음

예담 발행ㆍ280쪽ㆍ1만3,000원

“자기 스타일이 생기면 그건 거장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의 연출 스타일이 이런 거야, 이게 모두에게 인지되고, 본인도 알 수 있고 그러면 거장의 경지라고 생각한다.”

각본, 연출, 연기까지 1인 3역을 맡은 영화 ‘여배우는 오늘도’ 개봉을 앞두고 최근 열린 언론시사회에서 문소리가 밝힌 ‘거장’의 기준이란다. ‘여기서부터 예술이다’하는 기준을 ‘유사 이래 새로움’에서 찾는다면, 그리하여 이탈리아 미술가 피에로 만초니의 ‘예술가의 똥’ 통조림이나 사드의 소설 ‘소돔 120일’을 예술이라고 인정한다면, 다른 장르의 예술 역시 저 기준으로 거장을 구분할 수 있지 않을까. 자기 스타일과 동어반복의 차이가 무엇이냐는 건 다시 따져봐야겠지만.

한국 소설 좀 읽는다는 독자들 사이에서, 이름만으로 책을 집어 들게 하는 두 중견 작가가 나란히 소설집을 냈다. 프랑스 작가 르 클레지오가 “한국 작가 중 노벨상을 받는다면” 후보 0순위로 꼽는 이승우(58)와 독특한 상상력과 문체로 1990년대를 풍미했던 백민석(46)이다. 인간 실존의 문제, 성과 속의 이원성 극복, 초월자와 인간의 괴리가 데뷔 이래 줄곧 화두였던 이승우가 이미 제 언어를 가졌다면, 10년 동안의 은둔을 접고 2013년 소설가로 돌아온 백민석은 제 언어를 찾고 있는 중이다. 이를테면 이렇게.

‘이 세상은 견디는 것이다, 라고 말한 사람은 아버지였다. 나를 앞에 두고 말했지만 나를 향해, 나더러 들으라고 말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 말하는 사람은 말만 하고 듣는 사람은 듣기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말하는 사람은 자기가 한 말을 듣기도 하는 사람이다. 어떤 점에서는 누구보다 잘 듣고 가장 잘 듣는 사람이다. (…) 그러므로 오래 전에 아버지가, 이 세상은 견디는 것이다, 라는 말을 내 앞에서 했을 때, 그 말을 들은 사람은 나 혼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아버지도 듣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그야말로 듣고 있었던 것이다.’ (이승우 ‘모르는 사람’)

‘아, 그 쳇 베이커라는 사람, 우리 엄마도 아세요. 엄마가 교내 브라스 밴드에 있었거든요. 쓸쓸함의 본질을 아는 트럼페터였다고 하시네요. 여자는 나른 보이가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워주던 날, 쳇 베이커의 히트곡집을 사서 그의 손에 들려주었다. 그리고 편의점에 가서 자기 몫의 담배로 에쎄 한 갑과 라이터를 샀다. (...) “교수님, 우리는 너무 외롭지 않아요?” 나른 보이는 하이네켄 두 병을 마시고 할 수 있는 얘기치고는 지나치게 신파조여서 웃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말투로 속삭였다.’ (백민석 ‘죽은 아이는 멀리 간다’)

단편소설의 제목을 복수형으로 고친 소설집 ‘모르는 사람들’에서 이승우는 특유의 스타일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세상은 견디는 것’이라고 외친 아버지는 11년 전, 러시아 국적 보잉 747기가 유럽의 한 도시에 추락한 날 흔적 없이 사라졌다. 어머니는 탑승자 명단에서 여배우의 이름을 보고 아버지가 그 항공기에 타고 있었을 거라고, 아버지 회사 광고모델인 그 여배우가 아버지와 불륜을 맺고 비밀여행을 떠났다가 사고를 당했다고 믿게 된다. 그러나 아버지는 탑승자 명단에 없다. 실종 전에도 아버지를 제대로 몰랐던 어머니는 11년 뒤 아프리카 레소토에서 도착한 부고를 듣고 아버지를 겨우 이해하게 된다. 부고를 알린 선교회에서는 아버지가 선교사로 활동하다 말라리아로 죽었으며 꽤 오래 준비하고 레소토로 떠났다고 전한다. ‘어머니에게 아버지는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은 가장 모르는 사람이다.’

가장 멀리 있는 사람, 가장 모르는 사람의 실제를 마주하는 순간은 소설집 다른 단편에서도 이어진다. 단편 ‘강의’의 화자는 아버지가 죽은 후에야 아버지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듣게 되고, 단편 ‘복숭아 향기’의 화자는 자신이 태어난 M시에 근무하고 나서야 자신이 유복자로 태어나게 된 사연을 듣게 된다. 관념적 주제를 단순한 인물 구도와 사건으로 압축하는 이야기들은 “실로 형편없음”(문학평론가 김윤식)으로 요약할 만큼 평범하다. 하지만 이승우 소설에서 “줄거리란 등뼈이긴 해도 기꺼해야 제멋대로 끊어지는 촌충 같은 것”일 뿐. “이 어이없는 촌충을 잇는” “고수의 솜씨”, 즉 작가의 문체가 소설이 언어 예술임을 증명한다. 반복과 변주를 통해 같은 것을 두고 다른 지점을 찾아가는 이승우의 집요한 문장을 곰곰 곱씹다 보면 울림이 다가온다.

중견 작가 백민석이 소설집 '수림'을 냈다.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발표한 단편 9편은 전작의 조연이 다음 편의 주인공이 되는 연작 소설이다. 예담 제공
중견 작가 백민석이 소설집 '수림'을 냈다. 2014년부터 지난해까지 발표한 단편 9편은 전작의 조연이 다음 편의 주인공이 되는 연작 소설이다. 예담 제공

수림(愁霖): 어두침침하고 우울하게 내리는 긴 장맛비, 시름겨운 장마, 슬픈 장마. 백민석의 ‘수림’은 이 질척거리는 어감이 소설집 전체를 통과한다. 표제작의 주인공 남자는 번듯한 대기업 과장, 주말이면 자원봉사도 다닌다. 성 도착증으로 아내에게 이혼 당한 그는 자원봉사에서 만난 여자를 보면서도 성적 상상을 한다. “이어달리기처럼, 앞선 단편의 주인공이 이어지는 단편의 인물에게 주인공 자리를 넘겨주는 방식으로 쓰였다”는 작가의 설명처럼, 연작소설 9편이 이어진다.

‘아, 그 변태 이혼남 말이야? 남편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여자를 돌아보며 말했다. 오빠는 그게 무슨 소리야! 그냥 불쌍한 사람이지.’(‘비와 사무라이’) 남편과 저런 말을 주고받는 여자는 자살 중독에 시달리다, 사회성을 키우고자 나간 봉사활동에서 성 도착증 남자를 만난다. 대학시절, 자신만 보면 ‘귀여워 죽겠다는’ 표정을 지었던 남자와 연애했지만, 그 남자가 자신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에게도 그런 표정을 짓는다는 걸 알고 난 후 헤어졌고,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귀여워 죽겠다’ 표정을 지은 남자는 커서 소설가가 됐고, 그의 이야기는 단편 ‘검은 눈’으로 이어진다. 자살한 형의 조카를 가끔 돌보는 그는 시 쓰고 대학에서 시 습작도 가르치는 옛 애인을 가끔 만나는데, 그녀의 얘기는 인용한 소설 ‘죽은 아이는 멀리 간다’에서 다뤄진다.

이대로 100편도 나올 듯한,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는 안타깝게도 2000년대 한국 단편소설에서 지겹게 봐왔던 소재와 주제(대학이나 출판사에 다니거나 직업이 없는 작가나 문청(文靑), 그 주변 인물들이 연애를 계기로 모종의 시련을 겪다 소외감을 느낀다)를 벗어나지 않는다. 쳇 베이커의 ‘마이 퍼니 발렌타인’(단편들 속 대학 신입생의 엄마, 중년 시인과 소설가, 그 소설가의 형이 한때 듣거나, 선물하거나, 죽기 전에 튼다)이나 에쎄 담배, 하이네켄처럼 먹고 입고 쓰는 상품으로 작가는 인물의 계급과 나이를 상징하고 묘사하는데, 또한 안타깝게도 이 상품들은 중년 아재들의 보편적 취향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한때 ‘최첨단 문화코드’(문학과지성사)의 상징이었던 작가의 자기 언어를 조금만 더 기다려보자.

이윤주 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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