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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정일 칼럼]인종은 신이 만든 장벽도, 선물도 아니다

입력
2016.11.18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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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널드 트럼프의 선거 구호는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Make America Great Again)’였다. 트럼프는 이 구호 밑에 뭉친 백인 유권자들의 성원으로 제45대 미국 대통령이 되었다. 이들이 환호하는 위대한 미국이 백인만의 미국이라는 것은, 선거 이후 미국 곳곳에서 분출된 인종증오 범죄로 충분히 입증된다. 인종증오 범죄의 목표물 가운데는 이민자들이 세운 다양한 종교 시설이 포함되어있는데, 범죄 현장에서는 나치의 상징물인 하켄크로이츠(Hakenkreuzㆍ갈고리 십자가)와 함께 ‘트럼프 왕국 오직 백인(Trump Nation, Whites Only)’ 같은 낙서가 발견됐다.

미국의 백인 인종주의자들은 인종은 순수하고 신성한 것이며, 자신들과 타 인종 사이에는 넘어서지 못할 장벽이 있다고 믿는다. 미국 역사는 백인 인종주의자들의 이러한 주장이 허황하다고 말해준다. 미국 개척 시절, 대서양을 건너온 백인 개척민 사회는 백인과 흑인 사이의 성교를 엄격히 처벌했다. 흑인과 동침한 백인은 몸을 더럽힘으로써 신을 모독하고 기독교인의 수치가 된 까닭이다. 인종 혼합을 금지하기 위해 공공장소에서 행해진 책형에는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이 나란히 채찍을 맞았다. 하지만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을 똑같이 처벌했던 1620년 법령은 차츰 흑인 여성만 처벌하는 것으로 바뀐다. 그래야만 했던 이유를 알기란 어렵지 않다.

일반적이지는 않았지만 백인 남성과 흑인 여성은 결혼도 했다. 1955년, 앨라배마 주 몽고메리 시에서 버스 보이콧 운동을 시작했던 로사 파크스의 외할머니는 스코틀랜드계 아일랜드인 남성과 흑인 노예여성이 결혼을 해서 낳은 자손이다. 하지만 대다수의 혼혈은 결혼보다는 백인 농장주 남성이 흑인 여자노예를 겁탈한 때문에 생겨났다. 미국 흑인문학의 창시자이자 흑인 노예해방운동가였던 프레더릭 더글러스의 아버지는 메릴랜드 주 터커호의 백인 대농장주였고, 어머니는 그 농장의 흑인 노예였다. 또 맬컴 X의 어머니가 흰 피부를 가진 것도 그의 외할머니가 백인 농장주에게 강간을 당해 낳았기 때문이고, 앞서 나온 로사 파크스의 외할아버지 역시 백인 농장주와 그 농장에서 일하던 흑백 혼혈의 가정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일본 학자 오치 미치오(越智道雄)의 ‘와스프’(살림 1999)는 “남부 대농장주들의 노예제에 대한 공공연한 집착은 면화 재배를 위한 노동력 확보에도 있었지만 그 이면에 숨겨진 집착은 흑인 여성노예를 성적으로 괴롭혀도 강간죄가 적용되지 않았던 사실에 있다. 대부분의 백인 남성은 이런 악덕을 범했다. 토머스 제퍼슨에게조차 흑인 정부(情婦)가 있었다”고 쓰고 있으며, 미국 흑인의 80%가 백인 또는 인디언과 혼혈이라고 말한다(인디언과의 혼혈은 27.3%). 미국 저술가 타네하시 코츠는 ‘세상과 나 사이’(열린책들 2016)에서 미국 흑인을 “대서양을 건너 저질러진 강간의 아이들” 또는 “대량 강간으로 태어난 우리들”이라고 불렀다.

이런 증거들은 미국 소설가 제임스 볼드윈이 쓴 어느 에세이를 상기시켜 준다. 그는 1950년대 중반, 흑인 민권운동의 시발지인 앨라배마를 방문한 적이 있다. 거기서 만난 피부 빛이 아주 엷은 한 혼혈 흑인이 볼드윈에게 이렇게 말했다. “인종 통합은 남부에서는 언제나 지극히 잘 되어 왔지요, 해만 지면 말입니다.”미국 백인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이전부터 흑인의 신체를 강탈해 왔으며 미국은 한 번도 순수한 백인만의 땅으로 존재해 본 적이 없다. 백악관을 트럼프에게 비워줘야 할 버락 오바마가 미국으로 유학 온 아프리카 케냐 출신 흑인 학생과 미국 백인 여성 사이에 난 혼혈인 것처럼, 인종은 신이 만든 장벽이나 선물이 아니다.

제임스 볼드윈의 에세이가 실려 있는 책은 1965년 휘문출판사에서 나온 다섯 권짜리 ‘흑인문학전집’ 가운데 마지막 권이다. 그때와 지금을 단순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 이제 어느 누가 흑인문학전집을 만들겠다고 나설 것이며, 그 어느 독자가 읽겠는가. 한국 텔레비전에서 유명세를 얻은 외국 출연자 가운데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한 명도 없다. 우리는 명예 백인이고, 우리에게 아프리카계 미국인은 투명인간이다.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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