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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내 말했더니… 사내 설 자리 좁아져 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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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 내 말했더니… 사내 설 자리 좁아져 가고

입력
2015.04.03 2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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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해자는 조용조용 징계한 후 피해자도 다른 이유로 해임

사건의 정확한 내용 공개해 악성 루머 의한 2차 피해 막고

징벌적 손배 등 예방의무 강화를

한국중부발전 직원인 A(35)씨는 3년 전 상급자인 B(49) 차장과 이탈리아로 해외교육을 위한 출장을 갔다가 성추행을 당했다. 이 사실이 알려진 뒤 당시 해외교육 담당자인 C차장은 A씨의 피해를 구제하기는커녕 “몇 명이나 후리고 다녔냐”며 대놓고 성희롱 하고 다른 직원들 앞에서 “냄새 나니까 옷 좀 빨아 입고 다니라”는 등 모욕적 발언을 일삼았다. A씨는 성추행 건과 별개로 C차장의 성희롱을 사측에 알렸다. 3개월 뒤 열린 징계위원회에서 B차장은 해임, C차장은 감봉 3개월 처분을 받았다. A씨 역시 해임 조치를 당했다. 문서 허위작성과 근무지 무단이탈이 이유였다. 자유여행이 포함된 출장기안을 A씨가 올린 게 문제가 됐다. A씨는 “출장 중 자유여행 일정을 넣는 게 관례”라는 B차장의 조언대로 일정을 짰을 뿐이라고 해명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사측은 두 사람이 합의하면 복직을 시켜주겠다고 회유하기도 했다. A씨가 반발하자 사측은 2013년 1월 정직 6개월로 징계 수위를 낮춰 A씨는 같은 해 6월 복직했다. 해임된 B차장은 지난해 강제추행 혐의가 인정돼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 받았다. A씨는 “평소 B차장 평판이 좋았던 터라 내가 그를 유혹하고는 성추행을 당했다고 거짓말 하면서 돈을 요구한다는 악의적 소문까지 사내에서 나돌았다”며 “피해자에게 이렇게 불이익이 가면 누가 감히 사내에서 문제제기를 할 수 있겠냐”고 했다.

유명무실한 성희롱 피해자 불이익 금지 조치

공교롭게도 A씨의 민사소송을 맡고 있는 이은의 변호사도 직장 내 성희롱 피해자였다. 앞서 다니던 삼성전기를 상대로 똑같은 소송을 제기해 4년여 다툼 끝에 2010년 승소한 후 로스쿨에 진학해 지난해 변호사가 됐다. 사측은 상사의 성희롱 문제를 알린 입사 8년 차 이씨에게 조직부적응이라는 이유로 인사고과나 업무배제 등으로 불이익을 줬다. 르노삼성자동차에 근무하던 D씨도 팀장으로부터 1년간 성희롱에 시달리다 2013년 사측에 알린 뒤 “두 사람 모두 그만두는 게 깔끔하다”는 담당 임원의 말을 듣고 민사소송을 제기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피해자가 어렵게 성희롱 문제를 제기하더라도 이후 불이익 때문에 ‘참아도 문제, 말해도 문제’인 상황에 놓인다. 2001년 남녀고용평등법에 성희롱 피해자에게 불리한 조치를 해서는 안 된다(제14조2항)는 규정이 추가됐지만 유명무실하다. 한국여성민우회의 2014년 상담통계를 보면 직장 내 성희롱 상담 189건 중 38.6%(73건)가 사측의 불이익 조치 에 관한 것이다. 여성민우회의 이소희씨는 “회사 내에서 성희롱을 문제제기 했다가 피해를 입는 경험을 보면서 다른 피해자도 ‘저렇게 불이익 당하는데 차라리 가만있어야겠다’고 침묵하는 학습효과가 생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변호사는 “직장 내 성희롱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구성원 모두가 행복하고 안전하게 일할 수 있는 노동환경과 노동권 차원의 관점에서 풀어야 한다”며 “성희롱 불이익 금지 조항은 직장 내 성희롱 예방의 기본 전제”라고 했다.

제도 못 따라가는 사측과 직원들의 인식

통상 사측은 피해자를 중심으로 놓고 사건을 대하기 보다는 어떻게든 빨리 ‘문제’를 해결하는 데 주안을 두기 때문에 잡음이 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김금숙 민주노총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조 수석부위원장은 “가해자 징계가 이뤄지더라도 대부분 비공개로 처리된다”며 “그 사람이 어떤 행동을 했고, 왜 문제고, 그렇게 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내용 없이 징계라는 결과로만 나타나기 때문에 성희롱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다시 반복된다”고 꼬집었다. 이는 피해자가 사실과 다른 루머에 2차 가해를 당하게 되는 빌미도 된다. 공식적인 처리 절차를 거치면서 사건 내용을 공개하는 것이 성희롱의 고리를 끊는 첫 걸음이라는 지적이다.

성희롱을 대하는 내부 시선도 문제다. 가해자가 징계라도 받게 되면 “한 사람의 인생을 망쳤다”는 둥 피해자에게 비난이 가기도 한다. “성희롱 같은 문제가 생기니 여자랑 일하기 힘들다”는 소리도 쉽게 나온다. 성희롱을 당하고도 참는 게 합리적이라는 생각을 부추기는 사내 분위기도 팽배해 있는 것이다. 피해 여성은 회사에서 버티기 어렵다.

실효적인 방지대책은

연 1회 의무적으로 이뤄지는 성희롱 예방교육의 중요성이 강조되지만 실효성을 높일 필요가 있다. 사실 남성은 물론 여성 직원도 그걸 왜 받아야 하는지 귀찮게만 여기는 게 현실이다. 김영옥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보통 예방교육이 온라인을 통하거나 문서를 돌려보는 식으로 시늉만 내는데 한국양성평등교육진흥원 같은 곳의 수준 있는 강사를 불러 집체교육을 하는 게 좋다”며 “피해가 있을 때 초기에 상담할 수 있는 고충처리 시스템을 사내에 만들고 구성원에 알리는 것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특히 성희롱 고지 후 불이익 문제가 발생하는 건 사측의 장기적 인식이 부족하기 때문이란 지적이 나온다. 회사가 불이익을 줘서 사건을 키우면 피해자의 인생도 망치고, 회사도 이미지 등에 큰 피해를 입는 악순환에 대한 전략적 사고가 결여돼 있는 것이다.

사용자의 성희롱 예방 의무를 강제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으로 국회 입법조사처는 지난해 11월 발간한 ‘직장 내 성희롱 방지정책의 문제점과 개선과제’ 보고서에서 실제 손해액보다 더 많은 배상을 부과하는 징벌적 손해배상제를 제시했다. 미국은 이를 직장 내 성희롱에 적용하고 있다.

권영은기자 you@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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