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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표현의 자유라는 미망

입력
2015.01.22 2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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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산되는 샤를리 논쟁

표현의 자유가 갖는 폭력성

초월적 권리는 존재할 수 없어

연초 프랑스 언론사 샤를리 에브도에 대해 자행된 끔찍한 테러로 안타까운 목숨들이 희생됐다. 이 사건은 ‘표현의 자유’란 저널리즘의 준칙에 관해, 또 오늘날 점증하는 다문화 사회의 이면에 드리워진 깊고 어두운 그늘과 글로벌한 자본주의의 작동 원리에 관해 많은 질문을 던진다. 특히 이 사건 이후 프랑스를 위시한 많은 유럽 국가들, 특히 정치인들과 언론이 생성하는 일련의 담론들과 문화정치는 문제가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일례로 마누엘 발스 프랑스 총리는 “테러리즘, 지하디즘, 이슬람 극단주의와 전쟁 중”이라 했고,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 또한 테러로 희생된 경찰관들의 추도식에서 “우리의 자유를 위해 그들은 희생됐고, 여전히 내부와 외부에서 이슬람의 위협에 직면했다”고 선언했다. 독일과 네덜란드를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는 이슬람에 반대하는 시위와 극우 정당의 부상 등 정치적으로 우려스러운 현상들도 나타나고 있다. 샤를리 에브도는 테러 직후 발행한 최신호에서 또 다시 이슬람의 창시자 무함마드를 풍자하는 만평을 게재했다. 표지에는 “모든 것을 용서한다”는 문구 아래 “나는 샤를리다”라고 쓰인 종이를 든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는 일종의 노이즈 마케팅이 돼 출판사는 발행부수를 테러 이전보다 100배가 넘는 700만부로 늘렸다고 한다.

그러나 “나는 샤를리다”라는 정치적 구호에 내재돼 있는 ‘표현의 자유’란 가치에 대해 대부분의 선한 이슬람 교도는 불편한 심정을 감추지 않고 있다. 이는 결과적으로 체첸과 이란, 팔레스타인 등지에서 반 샤를리 에브도 시위를 촉발했고 여러 지역으로 확산 중이다. 여기에는 종교적 극단주의나 근본주의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넘어, 서구 언론과 정치인들이 표현의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구호 아래 무슬림의 믿음을 모욕하고 있다는 뿌리 깊은 불신이 깔려 있다. 즉 이는 언론의 자유란 이름을 빈 이슬람 문명 자체, 나아가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제국주의적 억압으로 인식되고 있다. 이는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을 연상하게 하고, 또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유럽 국가들에서 문화적 다양성이란 시대정신의 존중보다 새로운 인종차별주의와 오리엔탈리즘이 강화됨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사건과 관련해 제기되는 표현의 자유란 문제에 관해 이것이 과연 종교적 믿음을 포함해 문화적 상대성이나 삶의 양식과 관련된 모든 차이와 다원성을 압도하는 절대적이고 보편적 개념인지 진지하게 묻고 성찰해야 한다. 이를 둘러싼 공론의 장은 최근 단식하는 세월호 유가족들 앞에서 치킨과 피자를 먹으며 폭식 퍼포먼스를 한 일베 회원들, 그 밖에 지역ㆍ세대ㆍ젠더ㆍ계층 등 수많은 사회적 약자들에 대한 관용과 배려가 현저하게 부족한 한국 사회, 그리고 사회적 공기로서 비판의 화살을 거대 악이나 구조적인 모순 대신 ‘갑’으로 보이지만 실제로는 약자인 또 다른 ‘을’들에게 전가하며 자족하는 우리 언론에 필요한 일이기도 하다.

이슬람 문화에서는 성자 무함마드의 형상을 그리는 행위가 금기시되고, 더욱이 이에 대한 풍자는 용납되지 않는다고 한다. 이슬람교 역시 평화와 사랑의 종교로 지하드로 대변되는 종교적 근본주의나 극단주의와는 거리가 멀다고 알려져 있다. 다만 신성불가침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종교 지도자가 누드화 등으로 풍자된다면 대부분의 무슬림은 영적인 살인을 당했다고 느낄 것이다. 이런 금기는 어느 사회에나 존재하기 마련이고, 또 아무리 선한 의도일지라도 어떤 규범이나 준칙이 맥락과 문화를 초월해 기계적으로 적용될 순 없다.

표현의 자유는 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그러나 이는 다수의 힘없고 선량한 사회적 약자를 대변해 절대 권력을 감시하고 견제하는데 쓰여야 한다. 건전한 풍자에서 오는 해학과 골계미, 저항과 카타르시스의 미덕 역시 힘센 권력을 향할 때 극대화되고 의미를 지닌다. 한편에서 부상하는 “나는 샤를리가 아니다”라는 역설적 구호가 말해주듯 표현의 자유는 문화적 감수성과 타인의 자유를 침해해도 좋은 초월적 권리가 될 수 없다. 프란치스코 교황 역시 표현의 자유에도 한계가 있고 타인의 종교를 조롱해서는 안 된다 하지 않았나. 우리 사회도 표현의 자유에 대해 더 진지하게 성찰하고 숙의해야 할 때다.

류웅재 한양대 미디어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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