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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딥 포커스] 식빵ㆍ신발... 편법에 가려진 ‘욕 불감증’

입력
2017.02.09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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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이블이 자극적 언어로 인기 끌자

지상파도 시청률 경쟁 매몰돼 답습

무음ㆍ모자이크 등도 규정 걸리지만

방통심의위는 “인력 부족” 방치

지난달 6일 방영된 MBC '나혼자산다'는 배구선수 김연경의 욕하는 이미지를 '식빵여제' '식빵요정'으로 포장했다. MBC 방송화면 캡처
지난달 6일 방영된 MBC '나혼자산다'는 배구선수 김연경의 욕하는 이미지를 '식빵여제' '식빵요정'으로 포장했다. MBC 방송화면 캡처

# MBC 예능프로그램 ‘나 혼자 산다’는 최근 방송 한 회에서만 욕하는 모습이 6번이나 노출됐다. 무음 처리는 됐지만 “씨”로 시작하는 비속어를 ‘식빵’이란 자막으로 포장했다. 욕을 안 하는 장면까지 포함해 ‘식빵’이라는 표현을 18번이나 사용해 시청자들은 간접적인 욕 세례에 시달려야 했다. 제작진은 출연자인 배구 선수 김연경이 욕을 할 때 마다 ‘식빵 여제’라 칭하며, 대단한 일을 한 듯 포장했다. 김연경이 “앞으로 ‘식빵’이라는 말을 많이 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좋게 봐주셨으면 좋겠다”며 욕설을 예고하는 모습도 편집 없이 내보냈다.

# “이 차이코프XX야”. 지난달 22일 방송된 tvN ‘코미디 빅리그’의 ‘마이 마더’ 코너에서 개그우먼 강유미가 동료 개그우먼 허안나를 위협하며 한 욕이 여과 없이 나갔다. 제작진이 무음 처리도 하지 않고 내보낸 결과물이었다. ‘욕 방송’은 고삐 풀린 듯 계속 됐다. 한 주 뒤인 지난달 29일 같은 코너에서는 영화 ‘타짜’의 대사를 패러디하며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XX야?”라고 욕을 방송에 내보냈다.

예능프로그램에 욕설이 넘쳐나고 있다. 인터넷 방송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욕의 수위가 높다. 돌발적인 상황이 만들어내는 현장감과 재미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노출하는 경우를 고려한다 해도 지나치게 욕 사용 빈도가 높아 제작진이 시청자의 정서를 고려하지 않는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욕설 관련 제재 규정이 명확히 있는데도 제작진이 이를 제대로 지키지 않는 경우도 잦아 해당 기관의 제재와 방송국의 윤리 강화 등이 시급하다는 주장도 고개를 들고 있다.

일부 케이블방송에서 노출되던 욕설은 이제 공영방송까지 물들이고 있다. 지난달 13일 방송된 KBS2 ‘마음의 소리’ 특별판에 출연한 가수 김종국은 배우 이광수와 몰래카메라를 진행하는 도중 욕설을 내뱉었다. 욕설은 ‘신발’이라는 자막과 함께 비프음 처리됐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방통심의위)에 따르면 지상파방송의 경우 비속어, 은어, 저속한 조어 및 욕설 등에 대한 제재가 2014년 8건, 2015년 16건, 2016년 18건으로 증가하고 있다. 케이블방송이 자극적인 언행으로 시청률을 확보하다 보니 품위를 유지하던 지상파방송마저 시청률 경쟁에 매몰돼 케이블방송의 행태를 따라가고 있는 것이다. 최진봉 성공회대 신문방송학과 교수는 “공공의 전파를 이용하는 만큼 더 높은 공공성과 공정성이 요구되는데 지상파방송이 책임감을 잃은 듯하다”고 지적했다. 욕하는 예능을 바라보는 시청자의 눈도 곱지 않다.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식빵’은 문화가 아니고 욕”(gi****) “공중파에서 ‘식빵’은 편집해야 하지 않나”(9950****)라며 싸늘한 시선을 보내는 이들이 많다.

가수 김종국은 KBS2 '마음의 소리' 특별판에서 몰래카메라를 진행하던 중 욕설을 내뱉었다. 해당 장면은 비프음 처리됐다. KBS2 방송화면 캡처
가수 김종국은 KBS2 '마음의 소리' 특별판에서 몰래카메라를 진행하던 중 욕설을 내뱉었다. 해당 장면은 비프음 처리됐다. KBS2 방송화면 캡처

“무음은 되지 않을까” PD도 몰랐던 방송 윤리 규정

무음 처리하는 성의조차 보이지 않는 케이블방송과 달리 지상파방송은 무음 처리를 철저히 지키는 편이다. 그렇다면 무음 처리를 한 욕설 장면은 문제가 되지 않을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과거에는 방송 언어에 대한 규정으로 ‘방송은 바른 언어생활을 해치는 억양, 어조, 비속어, 은어, 저속한 조어 및 욕설 등을 사용하여서는 안 된다’(51조 3항)는 내용이 적용됐다. 제작진들은 무음, 컴퓨터그래픽(CG) 처리 등의 편법으로 교묘히 이 규정을 피했다. 이에 방통심의위가 2015년 '의도적으로 무음, 비프음, 모자이크 등의 기법을 사용한 욕설 표현도 방송의 품위를 해치는 행위'(27조 2항)라는 내용으로 규정을 바꿨지만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제작진은 드물다.

한 예능프로그램 PD는 “해당 조항에 대해 알고 있냐”는 질문에 “무음, CG 처리를 철저히 하면 될 것이라 판단했다”며 “한번 그랬는데 다음부터 주의하겠다”고 입장을 밝혔다. 욕설에 대한 불감증을 드러낸 것이다.

또 다른 예능프로그램 PD는 “방송사 심의팀이 검열을 하는데 ‘욕설은 비프음 처리를 해도 문제가 되니 무음 처리를 하라’는 지침을 받고 그렇게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시청자의 윤리적 감정을 해치는 욕설 장면은 무음까지 제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지하는 제작진은 찾기 힘들다.

'tvN '코미디 빅리그’의 코너 ‘마이마더'에서는 욕설이 자주 등장하지만 무음이나 컴퓨터 그래픽(CG) 처리 없이 그대로 방영되고는 한다. tvN 방송화면 캡처
'tvN '코미디 빅리그’의 코너 ‘마이마더'에서는 욕설이 자주 등장하지만 무음이나 컴퓨터 그래픽(CG) 처리 없이 그대로 방영되고는 한다. tvN 방송화면 캡처

제재 규정 있어도… 방관하는 방통심의위

방송사를 계도하고 제재해야 할 방통심의위의 소극적인 대처가 문제를 키우고 있기도 하다. 방통심의위는 예능프로그램의 일회성 욕설 노출을 비롯해 한 회에 수 차례 욕설이 등장한 ‘나혼자산다’도 심의 안건으로 상정할 계획이 없다. 방통심의위의 한 관계자는 “(‘나혼자산다’가)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기존 심의 사례들과 비교했을 때 수위가 낮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욕설의 노출 횟수와 위반의 정도, 시의성 등을 고려하기 때문에 예능에서 단발적으로 노출되는 욕설은 심의 안건 상정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며, 민원이 제기되면 실무팀이 상정 여부를 논의한다는 것이다. 욕설의 수위와 횟수에 대해 수치화된 기준도 없다. 해당 규정을 파악하고 있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나혼자산다’ 제작진에 연락을 했으나 이에 대한 답을 주지 않았다.

방통심의위는 “모든 위반을 다 적발하기가 어렵다”며 인력부족을 이유로 들었지만 엄연히 존재하는 규정에 대한 위반 사항을 방치하고 있다는 지적을 피하기 힘들다. 최재봉 교수는 “방통심의위가 방송사에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계도해 사전 노출을 방지해야 하는데, 방관하는 사이 욕설 방송이 확산됐다”며 “명확한 기준을 세워 규정을 개정하고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소라 기자 wtnsora21@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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