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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학교에 더 많은 영어를 허하라

입력
2018.01.10 20:0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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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걱정없는세상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10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유치원·어린이집, 학원의 영어 선행 교육 규제 촉구 연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은 유아들에게 불필요한 영어 선생 교육은 유치원, 어린이집 외에 학원도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시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등 시민단체 회원들이 10일 오전 정부서울청사 앞에서 유치원·어린이집, 학원의 영어 선행 교육 규제 촉구 연대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이날 기자회견에서 참가자들은 유아들에게 불필요한 영어 선생 교육은 유치원, 어린이집 외에 학원도 금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뉴시스

나의 육아는 이를 테면 영어와의 쟁투이기도 했다. ‘내가 영어만 잘했어도 한국에서 기자를 하고 있지는 않을 텐데’라는 근거 없는 믿음으로 차단된 시장 접근성에 천추의 한을 품은 탓이다. 나는 내가 국문학을 전공해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석사과정 중 미국으로 교환학생을 가보니 영문학 박사들도 수업시간에 꿀 먹은 벙어리이기는 마찬가지인 것이다. 토론이 팔 할인 대학원 수업에서 발표문이 없으면 아무 말도 못하는 학생들은 한국인들뿐이었다. 우리 나름 토플 고득점자들인데 이 어인 변고란 말인가. 드러내 밝힐 수 없는 나의 탁견은 그러니까 복분자 같은 것. 참 좋은데, 말로 설명할 길이 없네.

“마이 디어, 룩 앳 마미!” 이유식을 떠먹이며 같잖은 영어를 중얼거렸다. 그러면 이중언어자가 될 줄 알았지. 그런 일은 물론 벌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웃기는 시행착오를 거치며 막연한 심증이 모종의 확신으로 굳어갔다. 영어만 어느 정도 할 줄 알면 굳이 대학을 가지 않아도 되겠다! 세상의 모든 읽을 만한 텍스트는 영어로 씌어져 있고, 세상의 모든 재미있는 컨텐츠는 영어로 제작된다. 평생교육의 시대다. 성인이 돼 원어민 초등생 수준으로 의사소통만 할 수 있으면 굳이 대학을 가지 않아도 생존 가능하다. 구글과 유튜브가 너를 도울 것이다! 영어가 너를 자유케 하리라! 배관공이 된다면 최신의 기술을 구글에서 찾아 읽는다. 네일 아티스트가 된다면 할리우드의 최신 유행 트렌드를, 셰프가 된다면 제이미 올리버와 고든 램지의 요리를 유튜브로 배워 익힌다. 영어는 저 거대한 곳간을 여는 열쇠다. 복거일이 가능하지도 않은 영어공용화론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던 시절로부터 강산이 휙휙 바뀌었다. IT혁명은 바야흐로 영어의 위상을 세계공용어로 안착시켰다. 중국인들도 영어를 한다. 세계 어디에 가도 이방인끼리는 영어로 대화한다.

방과후교실 영어교육 금지로 전국의 학부모들이 총궐기할 태세다. 다시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서겠다는 무시무시한 반응도 드물잖게 보일 정도로 반발이 거세다. 교육부도 놀랐을 것이다. 과도한 사교육과 입시경쟁을 막으려면 영어 공교육이 시작되는 초등 3학년 이전에는 어떤 프로그램도 제공할 수 없는 게 당연한데 왜 이토록 화를 내는 것일까. 교육전문가들도 ‘초등학교 3학년에 시작하는 학교 교육이면 충분하다’고 입을 모으는데 왜 이렇게 난리인 걸까.

글로벌 시대에 성장한 지금의 젊은 부모들은 영어의 필요성을 몸소 느끼며 살아온 세대다. 영어에 대한 수요와 교육의 목표 자체가 IT혁명 이전과는 달라졌다. 전문가들의 주장처럼 초등 3학년이 돼 1주일에 40분씩 두 번, 그것도 한국어로 배우는 영어만으로는 조금도 충분치 않다는 걸을 너무도 잘 안다. 원어민 수준의 영어를 꿈꾸며 혀를 잡아 늘리는 수술을 할 정도로 미개하던 사람들이 아니다. 생존의 방편이자 직업의 기술로서 장차 삶에 필요한 의사소통능력을 어느 정도는 갖추게 해주고 싶다. 어린 시절 노래하고 춤추며 즐겁게, 조금씩 그러나 꾸준히 영어에 노출되면 좋겠다. 어마어마한 영어 실력을 원하는 게 아니다. 제 할 말은 좀 하고, 중요한 정보는 놓치지 않으며 살 수 있으면 족하다. 이 확고부동한 욕구를 공교육이 좀 해결해 달라는 것이다.

정말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원할 때는 그 이유에 대한 궁금증을 가져야 한다. 학부모는 아무것도 모르는 무지렁뱅이가 아니다. 일단 영어교육에 대한 국민수요조사부터 실시하자. 이를 근거로 영어교육의 목표부터 분명하게 세우자. 과도한 경쟁이 문제인가. 그렇다면 더 많이 가르치고 입시에서는 빼자. 수능 영어가 이미 절대평가다. 영어를 입시에서 해방시키면 드디어 영어를 제대로 배울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될 수도 있다. 소모적 논쟁은 그만두고 이젠 영어교육의 새 판을 짜야 한다. 왜 입시영어는 그렇게 어려우며, 기업들은 왜 그렇게 높은 영어 공인시험 점수를 요구하는가. 그러니 중학교에 입학하는 순간 입시영어만 공부해야 하고, 유ㆍ초등 과정에서는 실용 영어가 더 절실해지는 악순환이 계속된다.

어린 시절 외국어를 배우면 모국어가 억압된다는 것도 과장된 거짓말이다. 모국어도 못하는 아이 가둬놓고 온종일 영어 테이프만 틀어주던 시절에나 설득력 있던 비판이다. 모국어의 골격이 완성되는 6, 7세 정도면 약간의 외국어 노출은 언어의 대조군으로서 모국어를 강화한다. 한국 최초의 근대소설 ‘무정’의 이형식이 영어 과외선생이었다. 개화기 이래 씨름해온 영어교육, 이제는 좀 큰 그림을 그릴 때가 되지 않았는가.

박선영 기획취재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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