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원 기자

등록 : 2018.05.17 04:40

[36.5°] 평화가 일상이 되는 나라

등록 : 2018.05.17 04:40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4월 27일 공동 식수를 마친 후 군사분계선 표식물이 있는 판문점 ‘도보다리’까지 산책을 하며 담소를 나누고 있다. 고영권 기자

“평화가 일상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 1주년 소회를 밝힌 글에서 가장 마음 아팠던 대목이다. 평화가 평범한 삶의 일부가 되길 희망한다는 건 참 서글픈 일이다. 대한민국이 시리아나 아프가니스탄처럼 매일 총알과 폭탄에 아이들이, 어른들이 죽어나는 나라는 아니다. 하지만 전쟁과 죽음의 위협에서 그리 자유로운 나라라고 할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2006년 10월 9일 오전 10시 35분. 북한 함북 길주군 풍계리에서 1차 핵실험이 실시됐다. 점심 무렵 북한의 핵실험 성공 발표가 있었고, 밤 늦게까지 통일부 기자실에서 일해야 했다.

이 날을 잊지 못하는 건 평화롭고 행복했어야 할 일상이 위협 받은 기억 탓이다. 핵실험 직전인 같은 해 9월 말 결혼을 했다. 일주일 정도 신혼여행을 다녀오고 출근한 10월 3일 북한은 핵실험 강행을 공식 선언했다. 노무현 정부의 경고와 설득에도 불구하고 한가위 연휴가 끝난 9일 북한은 핵실험에 나섰다.

신혼집에서 기다리던 아내에겐 “창문 꼭 닫아. 혹시 방사능 낙진이라도 떨어질지 모르니까”라는 안부 전화통화를 했다. 제한적 핵실험 상황에서 제논, 크립톤 같은 방사성 물질이 서울까지 날아올 가능성이 낮았지만, 그렇게라도 해야 마음이 편해질 것 같았다. 지난 12년 아이들은 커갔지만, 5차례의 핵실험은 추가됐다. 머리 위에 핵을 얹고 살아야 하는 우리의 운명은 불우했다.

조금 더 직접적으로 전쟁 위협을 느꼈던 때는 2015년 8월이다. 북한의 목함지뢰 도발과 남북 간 포격전이 마무리된 뒤 당시 박근혜 정부 국방부의 준비 태세를 전해 들었다. 야전 군병원 병상을 비워놓고 실제 국지전 희생자를 각오했다는 말에 간담이 서늘했다. 당시에도 “만약 포탄이 서울에 떨어지면 어떡하나.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일단 한강 이남으로 피난부터 가야지”라는 얘기를 농담 반 걱정 반 섞어 가족에게 했던 기억이 있다. 지난해 말 미군 3개 항모전단의 이례적 동해 집결, ‘코피작전’ 경고 때의 전쟁 걱정도 남달랐다.

다행히 4ㆍ27 남북 정상회담으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선언’이 채택됐다. 북미 정상회담이 곧 개최된다. 풍계리 핵실험장은 일주일 뒤면 폐기된다. 2020년을 목표로 한반도 평화체제 수립을 향한 전진이 시작된 역사적 시점이다.

그러나 시작의 시작일뿐 갈 길은 멀었다. 당장 북한은 16일 남북 고위급 회담 개최 합의를 15시간 만에 파기했다.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의 경고 담화도 나왔다. 남북ㆍ북미 정상회담 판을 뒤엎을 정도는 아니겠지만, 언제든 깨질 수 있는 유리그릇 같은 한반도 평화의 수준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평화로 가는 길에서 가장 경계해야 할 지점은 막연한 낙관과 의도된 비관이다. 북한과 통일만 되면 한국 경제가 확 살아난다느니 하는 것은 지금으로선 지나친 기대다. 반대로 남ㆍ북ㆍ미의 평화 노력을 사사건건 폄훼하고, 저주하는 행태도 눈꼴사납다. 제2차 세계대전 영국 체임벌린 수상의 유화정책을 덧씌워 공격하더니, 이제는 파리협정의 월남 패망론과 연결시키는 극우주의는 더 큰 문제다.

평화는 도둑처럼 오지 않는다. 남북 불가침협정을 가장 먼저 제의한 대통령은 1974년 1월 연두 기자회견에 나선 박정희였다. 44년 세월 동안 무수한 희생을 거쳐 이제 평화를 향한 첫 발을 내딛는 조심스러운 순간이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양 정상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었음을 8,000만 우리 겨레와 전세계에 엄숙히 천명하였다.”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잉크도 마르지 않은 판문점선언을 다시 한 번 들여다보기 바란다. 평화를 바라는 8,000만의 염원을 외면해선 안 된다. 보통국가로 나가려는 북한을 지원하는 일, 그 지도자와 인민들에게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북한과 미국 사이에서 끌고 밀고 하는 중재자 역할이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다.

정상원 정치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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