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이윤주 기자

등록 : 2018.02.07 04:40
수정 : 2018.02.07 10:38

“악보 나눠주는 남자? 가장 늦게 퇴근하는 음악가죠”

[인터뷰] 김진근 서울시향 악보전문위원

등록 : 2018.02.07 04:40
수정 : 2018.02.07 10:38

김진근 악보전문위원이 서울시향 악보실에서 정기공연에 필요한 악보를 점검하고 있다. 김 위원은 “대부분 물건은 새것이 좋지만, 대여 악보는 연주법을 적어놓은 중고가 좋다”고 말했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지휘자용ㆍ파트별 등 수많은 악보

구입ㆍ대여부터 관리까지 도맡아

조 수정땐 악보 직접 그리기도

공연 100일 전부터 준비 늘 긴장

외국 지휘자에 배달 사고 진땀도

서울시립교향악단(이하 서울시향) 공연을 본 사람이라면 분명 이 사람을 만난 적 있다. 공연 시작 10분 전 무대 중앙 지휘대에 다가가 지휘자 총보를 챙기는 김진근(44) 악보전문위원이다.

‘혹시 아르바이트 아닐까?’ 싶지만 해외에서는 오케스트라 수석 단원과 맞먹는 전문직. 한국에서는 약 50여명이 활동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최근 서울 광화문 서울시향 악보실에서 만난 김진근 위원은 스스로를 “가장 일찍 출근해 가장 늦게 퇴근하는 음악가”라고 소개했다. “리허설 한 시간 전에 반드시 먼저 나와 연습 내내 대기하죠. 공연 끝나고 악보 회수해 관리하는 데도 한 시간이 걸려요.”

악보 복사해 나눠 주는 단순 업무라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서울시향 정기공연에 필요한 악보를 준비하는 건 평균 100일 전부터. 지휘자가 공연 프로그램을 정하면 악보 보유 여부를 먼저 살피고, 없으면 그 악보가 어느 출판사에서 출간되는지 확인하고 구입이나 대여를 결정한다. 서울시향이 보유한 악보는 약 2,700세트지만, 정기공연 중 보유 악보를 사용하는 빈도는 40%에 불과하다. 새 구매와 대여가 각각 30%가량 된다.

“(1일 공연한) 브루크너 교향곡 6번처럼 같은 곡이라도 갖가지 버전이 있는 경우 지휘자가 원하는 악보를 꼭 물어봐야 해요. 브루크너 악보는 저작권 기간이 끝났기 때문에 여러 편집본이 있거든요. 그중에서도 연주에 편한 최상의 악보를 찾아야 하죠.” 김 위원은 김보람 위원과 함께 서울시향 공연의 모든 악보를 책임진다.

‘최상의 악보’를 주문해도 그중 일부가 누락돼 받는 사고는 다반사로 일어난다. 정상적인(?) 악보도 연주자 배달 과정에서 우여곡절을 겪기도 한다. 지난 1일 서울시향 정기공연 객원지휘자인 안토니 헤르무스와는 2년 전 악보 배달 때문에 ‘페이스북 친구’가 됐다. “워낙 바쁜 ‘제트족(비행기 타고 해외 각지로 돌아다니는 유명인)’이라 페덱스로 부친 악보가 수취인 불명으로 서울로 되돌아온다는 연락을 받았죠. 젊은 친구이니 페이스북은 하겠지 싶어서 친구 신청해 10분 만에 연락이 닿았어요. 헤르무스 형에게 전달했습니다.”

서울시향의 악보 전문위원은 두 명이다. 김진근 위원이 정기공연을, 김보람 위원이 찾아가는 공연의 악보를 담당한다. 서재훈기자 spring@hankookilbo.com

김 위원이 서울시향에 재직한 건 10년 전인 2008년 9월부터다. 130대 1의 경쟁률을 뚫고 악보위원이 되기 전, 그의 직업은 드라마 음악 작곡가였다. 대학에서 작곡을 전공한 그는 노르웨이에서 클래식과 영화음악 작곡을 공부했고, 2004년 귀국해 KBS드라마 ‘불멸의 이순신’ OST 등 드라마, 방송 음악을 만들었다. 김 위원은 “보람도 있었지만, 프리랜서라 수입이 불규칙하니 스스로 의기소침해지더라”면서 ”그러던 차에 군대 동기한테서 연락을 받았다”고 말했다.

김 위원에게 연락한 동기는 서울시향 비올라 단원 임요섭씨다. 임씨는 국립경찰교향악단에서 악보 전문위원으로 군 생활을 했던 김 위원을 기억해 악보위원 뽑는 공고가 났으니 시험이나 한번 보라고 권유했다. 1차 서류심사, 2차 실무 면접, 3차 정명훈 예술감독의 면접을 거쳤다. “예전에 뭐했냐”는 정 감독의 질문에 “이력서 보시라”고 호기롭게 답한 김 위원은, 다시 “악보 위원에게 가장 중요한 게 뭐냐”는 질문에 “정확함”이라고 대답, 그날로 합격했다.

김 위원은 “군대 시절 악보 담당을 했지만 서울시향 정기공연의 악보를 챙기는 건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고 말했다. 지휘자 총보와 악기별 악보가 다른 경우 오류를 찾고 마디 번호를 맞춰 표기하고, 바이올린과 같은 현악기 악보의 경우 연주자들의 활시위 방향을 통일시키는 ‘보(bow) 사인’도 악보위원이 직접 그린다.

“성악가가 오페라 아리아나 가곡을 부를 때, 반음이나 한 음 바꿔 부를 때가 있어요. 이럴 땐 조옮김 한 악보를 다시 다 그려 준비합니다. 예고 없이 리허설에서 반음 낮춰 부르면 아찔하죠.” 악보를 해석하는 눈은 기본, 음악이론과 음악사, 관현악법, 이조(조옮김)법, 기보법 등 음악 지식과 출판업, 저작권법까지 두루 알아야 하는 셈이다. “제가 준비한 악보로 리허설이 진행될 때마다 보람을 느끼죠. 서울시향 연주곡이 굉장히 다양해요. 다른 오케스트라에서 서울시향이 무슨 악보를 사용했느냐가 기준이 될 때 뿌듯합니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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