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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띄워놨더니… 짐 싸고 내쫓기는 상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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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띄워놨더니… 짐 싸고 내쫓기는 상점들

입력
2015.08.23 2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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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삼청동·경리단길·가로수길 등

정작 동네 띄운 예술가·자영업자들

치솟은 임대료 감당 못해 쫓겨나

"결국 개성 잃고 상권도 죽어"

20일 찾은 서울 종로구 삼청로 대로변은 한때 젊은 예술인들의 ‘공방 천국’이라고 불렸던 게 무색할 만큼 대기업 업체들의 집합소로 변해 있었다. ‘삼청동 카페골목’으로 통하는 100m에 이르는 길은 좌우 29개 상점 중 절반(14개)이 유명 프랜차이즈 화장품, 액세서리, 카페, 초콜릿점 등으로 뒤덮여 있었다. 가지치기 하듯 양쪽에 뻗어 있는 골목 역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군데군데 작은 화랑이나 소상점이 눈에 띄었지만 이런 곳은 문이 닫혀 있는 곳이 많았다. 굳게 잠긴 문에는 “건물주가 권리금을 받지 말고 나가라고 했다”는 내용의 호소문이 붙어 있기도 했다. 인근의 한 상점 주인은 “대로변은 임대료가 부르는 게 값인데, 1년 만에 보증금을 100% 올려달라는 요구에 못 이겨 짐을 싸는 세입자가 꽤 된다”며 “보증금 억대에 월세 수백 만원을 감당할 만한 곳은 대기업밖에 없기 때문에 이곳이 건물주, 부자 임차인들의 천국으로 변해가고 있다”고 전했다. 실제 삼청동은 외국인 관광객의 필수코스가 되면서 임대료가 천정부지로 치솟고 있는 곳 중 하나다. 빌딩 임대ㆍ관리 전문업체인 태경파트너스에 따르면 삼청동 중심상권의 건물 1층 33㎡ 상가가 10년 전 보증금 1억원 월세 500만원 수준에서 현재는 보증금 2억원에 월세 700만~800만원으로 뛰었다.

비단 삼청동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다. 종로구 서촌, 북촌 한옥마을, 강남 신사동 가로수길, 이태원 경리단길, 성수동 등 뜨는 명소에서는 예외 없이 이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예술가ㆍ자영업자들의 이주→개성 있는 상권 형성→임대료 상승→대기업 업체의 점령→동네 띄운 상점들의 씁쓸한 이주’의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의 공습’이다.

23일 부동산114에 따르면 서울 이태원 상권의 월 임대료는 지난해 6월 9만4,380원에서 올해 6월 13만4,310원으로 42.3%, 성수동1가는 6만7,320원에서 9만1,080원으로 35.3% 폭등했다. 서울 가로수길이 있는 강남구 신사동과 서촌, 북촌 등이 포함된 종로구 일대 역시 월 임대료가 1년 만에 각각 15.6%, 26.6% 올랐다. 유명세를 등에 업고 임대료가 치솟고 있는 것이다.

이 덕에 건물주의 주머니는 두둑해지고 있지만 정작 동네를 일군 일등 공신인 세입자들은 자리를 떠야 하는 처지에 놓이는 경우가 많다.

임영희 맘편히장사하고픈상인모임 사무국장은 “지역이 유명해지자 터무니없이 높은 임대료를 요구하거나 명확한 근거도 없이 무조건 내쫓는 건물주의 횡포가 늘고 있다”며 “그런데도 건물주와 세입자의 관계가 불평등해 세입자들은 속으로 삭힐 뿐 항의도 제대로 못한다”고 말했다. 실제 최근 종로구 서촌만 보더라도 이곳에서 40년 쌀집을 운영한 상점 등 3곳이 건물주로부터 일방적으로 “나가라”는 통보를 받고 소송을 진행하고 있는 등 분쟁이 일고 있다.

지역 인지도가 조금만 올라가도 건물주가 ‘돈’에 눈을 뜨고 기획부동산까지 임대료 상승을 부추기면서 임대료에 거품이 끼고 있는 것 역시 문제다. 대표적인 곳이 성동구 성수동이다. 성수동은 젊은 문화예술가들이 저렴한 임대료를 찾아 흘러 들어오면서 이제 막 알려지고 있는 동네다. 하지만 상권이 완전히 형성되지 않은 탓에 메인 거리라고 불리는 지하철2호선 성수역 3번 출구 인근만 보더라도 신발이나 카페트 바닥재 등을 만드는 3층 이하 저층의 공장형 건물이 더 많다. 공방이나 카페 등은 손에 꼽힐 만큼 드문드문 끼어 있는 정도다. 그런데도 월세가 뛰는 등 임대료가 들썩이고 있다.

이곳에서 2년 전부터 옛 금속 부품공장을 임대해 작업실 겸 갤러리, 각종 촬영을 위한 대여공간으로 활용 중인 김정한 베란다 인더스트리얼 대표는 “동네가 알려지면서 최근 외진 곳에 있던 낡은 가게가 5년 만에 팔렸다고 하고, 공장건물이 40~50억원에 매물로 나왔다는 말도 들린다”며 “하지만 아직은 직장인들이 점심 시간에 짬을 내서 찾아오는 동네라 유동인구와 직결되는 카페나 음식점은 임대료를 조금만 올려도 직격탄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서 디자인 가게 겸 전시장을 1년간 운영했던 황병준 디자이너 협동조합 보부상회 이사장은 최근에 아예 둥지를 합정동으로 옮겼다. 그는 “계약 당시 보증금 2,500만원에 월 300만원으로 시세보다 높게 들어갔는데 1년 만에 월세를 10% 더 올려달라고 하더라”며 “주말에도 손님이 10명 정도인데 임대료만 높아 차라리 이 정도 비용이면 상권이 제대로 형성된 곳으로 이사하는 게 낫겠다 싶어 이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곳곳에서 문제가 발생하자 자치구 차원에서 해법을 모색하고는 있다. 임대료 폭증을 막겠다며 건물주와 세입자 간 상생협약(종로구, 서대문구)을 주선하거나 조례(성동구)를 만드는 식이다. 하지만 노력에 비해 이렇다 할 성과는 거두지 못하고 있다.

심교언 건국대 교수는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은 최근 미국과 영국, 일본 등 전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인데 동네가 개성을 잃고 결국 상권이 죽어버리는 부작용이 생기자 이들 국가도 해법을 모색 중”이라며 “외국은 직접 건물 일부를 매입해 개성 있는 가게가 유지되게 하거나 건물주에 인센티브를 줘서 영세 세입자들을 함부로 내쫓지 못하게 하는 방안 등을 강구하는데 우리도 적극적으로 이런 방법들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강아름기자 saram@hankookilbo.com

여선애 인턴기자(서강대 프랑스문화4)

●젠트리피케이션

개성 있는 가게들이 유입되면서 지역이 유명해지면 임대료가 오르고 애초 상권을 일군 상인들은 동네를 떠나게 되는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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