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일보>

양진하 기자

등록 : 2018.02.19 15:41
수정 : 2018.02.21 16:49

“더러운 욕망 억제 못했다”… 연극계 우상의 성추문 몰락

등록 : 2018.02.19 15:41
수정 : 2018.02.21 16:49

이윤택 ‘배우 성추행’ 공개 사과

단원들 항의에도 악순환 계속

“18년간 일어난 아주 나쁜 관행”

“어떤 벌도 받겠다” 성추행 인정

성폭행 주장엔 “인정 못해” 부인

연출가협회 제명 등 사실상 퇴출

문화게릴라로 주류 연극계 접수

우상화 입지가 피해자들 입 막아

연희단거리패 극단도 해체 선언

이윤택 연극연출가가 19일 오전 서울 종로구 30스튜디오에서 연극계 미투 운동으로 밝혀진 자신의 성추행 등에 대해 사과하며 고개를 숙이고 있다. 신상순 선임기자

국내 연극계 스타 연출가가 성추문 앞에서 고개를 떨궜다. 과거 배우들을 상습적으로 성추행했다는 폭로가 시작된 지 5일만이다.연극계 ‘미투’(Me Tooㆍ나도 당했다) 운동이 이끌어낸 결과다.

연극연출가인 이윤택(66) 전 극단 연희단거리패 예술감독은 19일 오전 서울 명륜동 30스튜디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말 부끄럽고 참담하다”며 “제 죄에 대해 법적 책임을 포함해 그 어떤 벌도 달게 받겠다”고 성폭력 피해자들을 향해 사과했다.

앞서 김수희 극단 미인 대표는 14일 새벽 페이스북 자신의 계정을 통해 이 연출가가 과거 배우였던 자신을 성추행했다고 폭로했다. 이 연출가는 연희단거리패를 통해 이 사실을 인정하고 모든 활동을 중단하겠다고 밝혔으나 극단 뒤에 숨은 간접 사과라는 비판을 받았다. 20여분간 진행된 이날 기자회견의 취재진은 100여명이었다. 현장에 있던 연극 관계자들은 “당사자에게 직접 사죄하라”고 외쳤다.

주변인 묵인 속 18년간 지속된 성추행

이 연출가는 안마나 연기 지도 도중 행해진 성추행이 오랫동안 상습적으로 행해진 일이었음을 인정했다. 그는 자신으로 인해 피해를 입은 당사자가 몇 명인지조차 잘 모르겠다고 했다. 이 연출가는 “어떤 때는 죄인지 모르고 저질렀고, 어떤 때는 알면서도 더러운 욕망을 억제하지 못했다”며 “극단 내에서 18년 가까이 일어난 아주 나쁜 관행이었다”고 밝혔다.

설 연휴 동안 인터넷 커뮤니티와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는 이 연출가와 관련한 폭로가 이어졌다. 공연커뮤니티인 디씨인사이드 연극ㆍ뮤지컬 갤러리에는 이 연출가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주장도 게재됐다. 그러나 이 연출가는 “성관계는 있었지만 폭력적이고 물리적인 방법으로 강제로 이뤄지지 않았다”며 성폭행 주장은 “인정할 수 없다”고 반박했다. 그는 “이 문제를 여기서 진위를 밝힐 수는 없어 법적 절차가 필요하며 사실과 진실이 밝혀진 뒤 그 결과에 따라 응당 처벌받아야 한다면 받겠다”고도 말했다.

이 연출가는 “오롯이 내 잘못”이라고 선을 그었지만, 이 연출가가 이끌어 온 연희단거리패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날 이 연출가와 연희단거리패에 따르면 극단 내부에서도 이 연출가의 상습적인 성추행을 모르지 않았다. 이 연출가는 “이 사실을 알고 있었던 일부 단원들은 끊임없이 제게 문제제기를 하고 항의했다. 다시는 안 그러겠다고 약속했지만 번번이 지키지 못해 악순환이 계속돼 왔다”고 말했다. 이 연출가는 4,5년 전 자신에게 성추행을 당한 단원들의 고발로 전체 단원들 앞에서 2번이나 공개사과를 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 연출가의 기자회견 직후 기자들과 만난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는 “‘우리 선생님’이라는 생각과 성폭력이라는 인지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며 “법적인 대응까지 나아가지 못하고 (이 연출가) 개인적 차원에서 해결하려 한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다. 그는 “저도 비슷한 상황이 있을 때, 못하겠다고 말씀을 드렸다. 그래서 후배들 역시 단호하게 거부를 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 구시대적 인식이 지금의 문제를 만들었다”며 눈물을 보였다.

이 연출가가 1986년 부산에서 창단한 연희단거리패는 자체 극장인 가마골소극장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연극을 만들어 온 한국 대표 극단이다. 연기를 공부하는 배우들은 연희단거리패에 들어가 합숙하며 무대에 오르는 것을 소중한 기회로 여겼다. 성폭력 사건에 적극적인 문제제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는 환경이었다.

연극연출가협회 영구 제명 등, 우상의 몰락

연희단거리패 뿐만 아니라 이 연출가 자체가 연극계의 아이콘이었다. 비주류 출신으로 연극계 주류가 된 ‘문화 게릴라’라 신화적 인물로 여겨졌다. 이 연출가는 서울연극학교를 다니다가 중퇴한 이후 부산 우체국, 한일합섬, 한국전력 등 13가지 직업을 거쳤다. 2년제 방송통신대 학력으로 부산일보에 입사해 기자생활을 하다 35세에 연극판으로 돌아왔다. 이후 놀라운 성과들을 내놓으며 변방에서 중심부로 단숨에 진입했다. ‘오구’ ‘문제적 인간 연산’ 등 한국적 색채를 가미하거나 ‘시민K’처럼 사회현실을 고발한 연극을 통해 동아연극상, 서울연극제, 백상예술대상 등 각종 연극상을 휩쓸었다. 2004년에는 국립극단 예술감독을 맡았고, 2008년에는 석ㆍ박사 학위 없이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교수가 돼 화제가 됐다. 경남 밀양시에 국내 최초의 연극 마을인 밀양연극촌을 만들었다. 이런 입지전적인 이력은 인간 이윤택을 우상과도 같은 존재로 만드는데 일조했고, 결국 피해자와 주변인들의 입을 막았다.

하지만 잇단 성추문 폭로로 이 연출가는 연극계에서 사실상 퇴출되는 상황을 맞았다. 한국연극연출가협회와 서울연극협회는 19일 이 연출가를 최고 수준의 징계 차원에서 제명하기로 의결했다. 국제아동청소년연극협회(아시테지) 한국본부는 이 연출가의 회원 자격과 연희단거리패의 단체회원 자격을 박탈했다. 한국극작가협회는 전날 극작가이기도 한 이 연출가를 회원에서 제명했다. 밀양시는 밀양연극촌을 무상위탁으로 운영, 관리해 오던 계약을 해지한다고 밝혔다.

이 연출가가 창단해 사실상 이끌어온 연희단거리패는 이날 극단을 32년 만에 해체한다고 밝혔다. 김소희 대표는 “남아있는 우리가 악순환을 끊어야 하고 사과도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극단이 없어져야 한다고 결론내렸다”고 말했다. 극단 관련 건물도 모두 처분할 계획이다. 김 대표는 “피해자를 직접 만나는 등 자체 진상조사를 끝까지 책임지고 결과를 공개하겠다”고 덧붙였다.

양진하 기자 realh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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