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잡무만 1~2년 경력 인정 안돼… 정규직 '백일몽' 꾸는 미생 신세

알림

잡무만 1~2년 경력 인정 안돼… 정규직 '백일몽' 꾸는 미생 신세

입력
2015.05.23 04:40
0 0

일자리 줄면서 경쟁 치열

견디다 못한 취업준비생들

"일단 질낮은 일자리라도…"

채용할 땐 "정규직 징검다리"

뽑고 나선 "어차피 나갈 인력"

청년들의 취업 양태도 구조적 악순환에 접어들었다. 저성장과 기업의 해외진출에 따른 고용 축소와 간접고용으로 일자리의 질이 눈에띄게 나빠졌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청년들의 취업 양태도 구조적 악순환에 접어들었다. 저성장과 기업의 해외진출에 따른 고용 축소와 간접고용으로 일자리의 질이 눈에띄게 나빠졌다. 사진=게티이미지뱅크

4년제 지방대 졸업을 앞둔 회계 전공 취업준비생 A(27)씨가 채용사이트에 올린 질문과 답글은 슬픈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다. 각종 자격증에 어학연수, 인턴, 경진대회 봉사활동까지, 지방대 한계를 넘기 위해 절치부심 학교생활을 했지만 막상 마지막 학기가 되자 취업문턱이 높다는 걸 실감했다. 전형마다 낙방해 채용사이트만 들여다보던 그에게 대기업인 H사의 1년짜리 재무 파트 파견계약직 제안이 들어오자 마음이 설렜다. A씨는 “회계 쪽은 실무경험이 중요해서 얼른 해보고 싶은데”라면서 파견계약직이 경력에 도움이 되는지, 1년 후 모습이 어떨지 묻는다. “급여도 괜찮아 보이고, 1년이면 많은 걸 배울 수 있다”는 답글 뒤에 “남의 인생이라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말하지 말라”는 냉소가 줄을 이었다. “한번 계약직이면 평생 계약직을 한다. 1년 일하고 평생 후회하지 마시고, 1년 동안 미친 듯이 공부하라” “파견직이 정말 일을 잘해서 부서장이 정규직을 추천해도 인사팀에서 말린다” “1년 ‘땜방’으로 들어온 사회초년생에게 중요 업무를 시킬 리도 없고, 가르침을 받지도 못한 채 잡무만 한다” “‘계약직으로 일단 시작해 돈 벌면서’라는 말이 가장 무서운 말’”이라는 등 심사숙고 하라는 조언이 태반이다. “24시간 취업준비를 해도 어려운 일인데, 직장 다니면서 자기계발이 가능하겠느냐. 계약직으로 들어온 친구치고 인생이 잘 풀리는 걸 보지 못했다”는 총무ㆍ인사과 경력 13년이라는 이의 냉정한 말은 A씨를 주눅들게 했다.

청년취업 문제가 어제오늘 일은 아니지만 청년 실업의 악화 못지않게 취업 양태도 구조적 악순환에 접어들었다. 저성장과 기업의 해외진출에 따른 고용 축소→인턴 등 과도기 일자리 정착→파견계약직 같은 간접고용 등 과도기 일자리 확대 과정을 밟고 있는 것이다. 멀쩡한 학벌을 갖춘 청년들마저 취업준비 기간이 길어지고, 견디다 못한 취업준비생 일부는 파견계약직 같은 질 낮고 불안정한 일자리로 내몰리는 양상이다. 괜찮은 일자리가 갈수록 줄어드는 반면 직업을 갖지 못한 청년 산업 예비군이 누적되는 데 따른 현상이다.

이를 뒷받침하는 흥미로운 통계가 있다. 청년인구 감소에도 불구하고, 청년(15~29세) 중 학생 비중은 2005년 39.3%(390만명)에서 지난해 47%(446만명)로 50만명 이상 늘어나는 기현상을 보였다. 반면 청년 취업자 비중은 45.3%에서 40.5%로 크게 줄었다. 현대경제연구원 김광석 선임연구원은 “취업준비기간이 장기화하면서 재학기간이 늘어나거나 취업문턱이 높아 대학원 등으로 진학한 것”이라고 말했다. 기업의 재학생 선호 경향에 따라 졸업 학점을 다 따고도 학교에 적을 두고 취업 준비를 하는 속칭 ‘화석인’도 대학가에 적지 않다.

파견계약직은 젊은 층의 치열한 취업 경쟁과 절박한 상황을 파고든다. 증권사를 퇴사한 뒤 다시 취업을 준비중인 이모(28)씨는 “4년 만에 다시 취업준비생이 되다 보니 취업 사이트에 파견계약직 구인 공고가 크게 늘어 놀랐다”고 말했다.

파견계약직을 평생직업으로 삼겠다는 취업준비생은 없다. 인턴 같은 과도기 노동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러나 배우는 것 없이 허드렛일만 한다는 점에서 인턴과 다를 게 없지만 전혀 다른 비애를 맛 보는 경우가 많다. 취업준비를 하다 모 기업의 파견계약직으로 일하고 있는 서모씨는 “회사에서 거의 유령 취급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같은 업무공간에 있지만 직접 고용이 아니라 동료라는 인식이 없는 탓이다. 고용주와 사용자가 다르다 보니 임금은 물론 법적 책임에서 차별을 받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물론 원하는 직장, 정규직으로 가는 징검다리로써 파견계약직도 경험해볼 수 있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업무 평가 후 자체 계약직이나 정규직 전환 가능, 정규직 채용을 위한 단계라는 등으로 파견계약직 채용 공고를 내는 기업들이 있지만 대개 계약기간이 끝나면 다른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 업무 역량을 쌓을만한 일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차피 1~2년 뒤면 떠날 인력이어서 회사에서도 단순 반복적인 일만 맡긴다. 취업학원 위포트학원 조민혁 강사는 “불안한 취준생들이 회사 지원 시 경력으로 인정되지 않을까 싶어 이것 저것 하는데 대기업이 요구하는 것은 직무 관련 능력”이라며 “다른 회사에서 몇 개월 잡무를 하다 퇴사했다고 그런 걸 경력으로 인정하지는 않는다”고 말했다. 조씨는 6년간 포스코에서 대졸신입사원 채용을 담당했다. 늦깍이 취준생인 김모(28)씨는 “파견계약직 근무도 고려해봤지만 경력도 인정이 되지 않는다고 해서 접었다”고 말했다.

교육 또는 사회 경험이라는 미명 하에 강요되는 열정페이, 무급인턴에 더해 파견 근로까지 청춘이 겪어야 할 짐과 착취 구조가 공고해지고 있다. 현실은 참담하고 미래는 암담한 게 지금 청년들이 놓인 위치다.

권영은기자 you@hk.co.kr

[썸머의 어슬렁청춘] ▶바로가기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