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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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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젠트리피케이션이란 없다”

입력
2017.11.27 14:35
2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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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현방 런던정경대 부교수가 국내 젠트리피케이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안티 젠트리피케이션’을 펴냈다. 경희대학교 제공
신현방 런던정경대 부교수가 국내 젠트리피케이션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함께 ‘안티 젠트리피케이션’을 펴냈다. 경희대학교 제공

최근 서울 서대문구의 45년 된 헌책방 ‘공씨책방’이 건물주와의 명도소송에서 패해 가게 문을 닫게 됐다. 서울시가 ‘하사’한 미래문화유산이라는 명패도, 헌책방 1세대라는 자부심도, 법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소송 당시 판사는 “현행법에서는 이런 결론 밖에는 가능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도시 개발 과정에서 새로운 부동산 자본이 유입되고 기존 주민들이 축출되는 현상을 일컫는 젠트리피케이션은 이제 우리의 일상을 깊이 파고든 용어가 됐다. 신현방 런던정경대(LSE) 지리환경학과 부교수가 엮고 11명의 필자와 함께 쓴 ‘안티 젠트리피케이션’(동녘)은 젠트리피케이션을 ‘일상의 재난’으로 묘사한다. 런던에 거주 중인 신 교수는 한국일보와 전화 인터뷰에서 “지난 2,3년간 한국을 오가며 ‘재난 현장’에서 만난 사람들과 젠트리피케이션 극복 방안을 고민했다”며 “이 책은 학술논문이나 연구서가 아니라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현장의 목소리”라고 말했다.

책에 참여한 필자들 다수는 가수 싸이와의 분쟁으로 상업적 젠트리피케이션의 상징이 된 서울 한남동 테이크아웃드로잉 카페에서 연을 맺었다. ‘재난’이란 표현도 테이크아웃드로잉 디렉터이자 책의 필자인 최소연씨가 처음 쓴 것이다.

“어떻게 해도 막을 도리가 없는 천재지변과 같다는 점에서 재난이란 표현은 적절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자연재해에도 사회적 요소가 있습니다. 최근 도시연구자들은 도시 계획의 불평등으로 인해 사회적 약자들이 같은 재해에도 더 많은 피해를 입는다는 이론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재난이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 문제라면 그 극복방안도 공동체 차원에서 고민해야 합니다.”

2015년 건물주인 가수 싸이와의 분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상징이 된 한남동 테이크아웃드로잉 카페. 정용택 감독 제공
2015년 건물주인 가수 싸이와의 분쟁으로 젠트리피케이션의 상징이 된 한남동 테이크아웃드로잉 카페. 정용택 감독 제공

책은 기존 젠트리피케이션의 논의에서 한발 더 나가 한국의 상황을 살피고 구체적인 대안 모색에 집중한다. 노동당 서울시당 위원장을 지낸 김상철씨는 건물주의 상권 강탈이 합법적으로 이뤄질 수 있는 제도의 허점을, 변호사 이강훈씨는 현행 임대차보호법이 보장하는 임차인의 계약갱신청구권 기간이 상가는 5년, 주거는 2년으로 불균형하다는 점을 지적했다.

“안티 젠트리피케이션은 결국 인간의 정주성을 보호하는 운동입니다. 소득수준에 관계없이 누구나 자신이 속한 공간에 대한 권리를 인정 받아야 한다는 것이죠. 상가와 주거 임차인의 권리에 차이가 있다는 건 지역을 기반으로 한 정주성 운동이 불가능해진다는 뜻입니다. 자기가 사는 동네의 단골가게 지키기 운동을 해도 2년 뒤엔 본인이 다른 지역으로 이사를 가야 하니까요.”

신 교수는 정주성의 의미를 공간에서 동식물로 확대해 이들에게 ‘시민권’을 부여해야 한다는 이색 의견도 내놨다. 오래된 주거 단지의 조경수, 오솔길, 길 고양이에게도 정주의 권리가 있다는 것. “아파트 재개발 과정에서 조경수의 80~90%는 그냥 잘린다고 보면 됩니다. 그러나 인간이 공간과 이루는 생태계에는 다른 생명체들도 포함됩니다. 동식물에게 시민권을 부여하는 일은 한국의 재개발 방식을 비판적으로 보게 하는 역할을 할 거라고 봅니다.”

그는 젠트리피케이션을 도시 개발의 불가피한 과정으로 보는 중립적 시선과 달리 “좋은 젠트리피케이션은 없다”고 단언한다. “젠트리피케이션의 피해자와 수혜자가 동원 가능한 자본의 크기가 다르다는 점에서, 좋은 젠트리피케이션은 재난의 당사자에게 조용히 있어 달라는 말 이상으로 해석될 수 없습니다. 좋은 젠트리피케이션이 형용모순이라면 나쁜 젠트리피케이션은 동어반복입니다.”

황수현 기자 s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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