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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인잡는과학] 관련 없어 보이던 두 목졸린 시신… 연결고리는 ‘남색 단추’였다

입력
2017.04.1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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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사 같았지만 의심스런 정황

지방 도시 한 빌라서 숨진 여성

현관ㆍ작은방 누군가의 구토 자국

시신에 ‘목졸린 흔적’ 울혈 발견

피의자는 피해자 집에서의 자살 시도 실패 이후 오전 9시쯤 한 해수욕장에서 목을 맸다. 이씨가 발견된 해수욕장 관리사무소 뒤 철제 구조물의 모습.
피의자는 피해자 집에서의 자살 시도 실패 이후 오전 9시쯤 한 해수욕장에서 목을 맸다. 이씨가 발견된 해수욕장 관리사무소 뒤 철제 구조물의 모습.

◆검시로 드러난 타살 흔적

김씨 목ㆍ손톱에서 채취한 DNA

당일 해수욕장서 목맨 이씨 것 확인

바지 밑단ㆍ셔츠에 구토 자국

떨어진 셔츠 첫번째 단추도 일치

◆끝내 미궁에 빠진 범행동기

손으로 목 졸려 질식사 결론

피의자ㆍ피해자 사망해 불기소

지난해 3월 28일은 유난히 바쁜 날이었다. 지방 도시 한 해수욕장에서 목을 매 숨진 60대 남성의 검시가 끝나자마자, 다른 장소에서는 병사한 노인이 발견됐다. 연달아 두 건의 검시를 끝낸 검시팀이 사무실로 들어온 게 오후 3시쯤. 이번엔 시내에서 또 다른 변사 신고가 접수됐다. 숨 돌린 틈 없던, 흔치 않은 분주한 날이었다.

신고가 들어온 빌라 맨 꼭대기 5층, 현장에 출동한 임채원(44) 검시팀장(검시관)과 박홍대(44) 경사, 윤여곤(42) 경장의 눈에 가장 먼저 띈 건 현관 안쪽 구토 자국이었다. 시간은 좀 지난 듯했지만, 누군가 치운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숨진 62세 여성 김순희(가명)씨. 그는 이 곳에서 혼자 살고 있었다. 가족이 김씨를 발견, “주무시던 중에 돌아가신 것 같다”며 경찰에 신고했다. 노령인구가 많은 도농(都農) 지역에서 홀로 자연사하는 일은 흔했다. 특히나 안방을 포함, 깔끔하게 정돈된 집안의 현장 상황은 검시팀 경험상 ‘타살보다는 자연사’에 가까웠다.

그런데 작은방으로 들어간 임 팀장은 이내 고개를 갸웃했다. 사용하는 사람 없는, 텅 빈 채 버려뒀던 방이었지만, 최근에 ‘누군가’ 남겨 놓은 듯한 흔적들이 보였다. 어쩌면 ‘단순 자연사가 아닐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방문을 열자마자 현관의 것과 비슷한 구토 흔적이 방 바닥 두 군데에서 발견됐다. 역시나 치운 흔적은 없었다. 커튼을 묶어두는 끈도 매듭이 여기저기 풀린 채 방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무엇보다 성인 남성 키보다 조금 높은 2m 가량 위치 벽에 뻥 뚫린 작은 구멍(지름 5㎝)이 눈에 들어왔다. 에어컨 등의 배관을 위해 사용됐을 구멍으로 올가미 형태로 매듭지어진 전선줄이 나와 있었다. 구멍 아래로는 작은 목욕의자가 넘어져 있었다. 박 경사가 작은방 뒤 베란다로 가보니, 전선줄은 철심에 감겨 고정돼 있었다. ‘커튼 끈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하자, 전선을 강하게 고정해 다시 시도한 것은 아닐까.’ 자연사가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은 점점 깊어졌다.

임 팀장 등 검시팀은 본격적으로 안방을 둘러봤다. 의심을 구체적으로 확인해야 했다. 시신 위 이불이 먼저 눈에 거슬렸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올려놓은 듯, 두 장이 엉켜진 채 시신 위에 ‘쌓여’ 있었다. 경험상 자연사의 경우 이불 하나를 반듯하게 덮고 있는 게 대부분이었다. 그날의 새벽 기온은 5도 정도. 쌀쌀한 날씨에 이불 두 장이 필요했을 거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임 팀장은 ‘그래도 뭔가 자연스럽지 않다’고 여겼다.

자연스럽지 않은 건 한둘이 아니었다. 김씨가 입고 있는 옷에도, 바닥에 널린 옷가지 어디에도 구토의 잔여물은 묻어있지 않았다. 분명 현관과 작은방에는 3곳의 구토 흔적이 있었다. 임 팀장은 “적어도 바지 끝단에라도 잔여물이 튀어있어야 했다“며 “주변 옷가지는 물론 시신의 입 속에서도 확인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김씨가 아니라면, 또 다른 누군가 현장에 있었다는 얘기였다.

작은방에 떨어져 있던 남색 단추도 의미심장했다. 김씨의 옷에서 떨어져 나온 것일 거라 생각하고 안방의 옷 전부를 살펴봤지만 그 어떤 옷과도 맞지 않았다. 사망한 김씨의 단추가 아니라면, 또 다른 누군가가 그 어떤 이유로 옷에서 단추를 떨어뜨렸다는 뜻. 그 누군가를 찾아야 했다.

임 팀장 등은 시신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연사가 아닐 수 있다’는 의심은 더욱 커져만 갔다. 얼굴에 암적색 울혈이 심했다. 울혈은 목에 있는 정맥 혈관이 외력에 눌려 피가 목 아래로 원활하게 흘러가지 못해 얼굴에 있는 모세혈관이 터지면서 생기는 현상으로, 자연사한 시신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 경험상 ‘끈이나 손에 의해 목이 졸려 사망했다’는 의미다. ‘작은방에 남아 있는 두 번의 자살시도 때문에 생긴 현상이었다면?’

이 가능성에 임 팀장 등은 고개를 저었다. 시신의 목에 끈으로 인한 찰과상이 있어야 했지만, 시신에는 아무런 자국이 없었다. 분명 자살이라고 하기엔 ‘있어야 할 것은 없었고, 없어야 할 것은 있었다.’ 검시팀은 담당 형사에게 휴대폰 통화내역과 폐쇄회로(CC)TV 확보를 요청하고, 폴리스라인을 친 뒤, 시신을 병원으로 옮겼다.

본격적인 검시에서 타살 의심은 확신으로 바뀌어갔다. 스스로 목을 매 사망했다면 끈이 혀뿌리를 누르기 때문에 혀는 입 밖으로 완전히 튀어나와 있어야 했다. 하지만 시신의 혀는 조금만 나와 있었다. 목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작은 생채기와 강한 압박으로 인한 눌린 자국도 보였다. 전형적인 액흔(扼痕), 즉 손으로 누른 흔적이었다.

시신의 또 다른 여러 흔적들도 타살을 말하고 있었다. 산소가 부족할 경우 피부 등이 푸른색을 띄는 증상(청색증)도 피해자의 손톱 끝에 또렷하게 보였다. 반항하면서 생긴 듯 손가락 끝의 피부는 심하게 벗겨져 있었다. 강간 흔적은 없었지만 정액반응 검사 키트에 피해자의 질액을 떨어뜨리자 양성 반응이 나왔다. 적어도 1주일 내 누군가와 성관계를 했다는 증거였다. 바로 그 사람이 범인일 수 있다고 수사팀은 생각했다.

현장에 있었던 ‘누군가’를 찾는 일이 핵심으로 떠올랐다. 시신은 타살 가능성을 얘기하고 있었지만, 용의자를 콕 짚어주지는 않고 있었다. 단서는 의외의 곳에서 등장했다.

“뭔가 이상한데요.” 검시가 한창인데, 사건 담당 이준선(45) 형사가 숨진 임씨의 통화내역 분석 내용이 담긴 자료를 들고 병원 안치실로 황급히 뛰어들어왔다. “아침에 해수욕장에서 자살한 사람 있지 않습니까, 그 사람이랑 (김씨가) 통화한 기록이 나오네요?”

해수욕장에 있는 233㎝ 높이 구조물에 목을 매 사망한 이태식(당시 62ㆍ가명)씨는 남색 셔츠 위에 패딩 점퍼를 입은 채 낮 12시쯤 발견됐다. 발 밑에는 맥주 박스가 있었고, 시신 주변에서는 지갑과 담배, 라이터가 발견됐다. 얼굴 부위 울혈도 발견되지 않았다. 주변 CCTV는 이씨가 당일 오전 9시10분쯤 택시에서 내려 해수욕장으로 향했다는 사실을 말해줬다. 사망 추정시간은 5시간 이내. 전형적인 ‘완전 목맴사’, 목을 매 발이 공중에 뜬 채 자살한 것으로 검시팀이 결론 내린 사건이었다. 그런데 자살한 남성과 죽은 김씨 사이에 통화를 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임 팀장은 눈이 갑자기 밝아짐을 느꼈다.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이던 두 변사 사건을 연결 짓자, 별 의미 없이 여겨졌던 단서들이 하나 둘씩 눈에 들어오더니 연결됐다. 검시 당시 이씨의 바지 밑단과 셔츠에는 구토 흔적이 묻어있었고, 셔츠 첫 번째 단추는 떨어진 상태였다. 김씨 집에서 발견한 ‘주인 없는’ 토사물과 단추를 떠올린 임 팀장은 마침 같은 병원 영안실에 있던 이씨의 시신을 보여달라고 요청했다. “남색 단추를 떠올리자마자 ’아, 잡았다’라는 생각이 번뜩 들었죠.”

검시팀은 이씨의 시신에서 DNA를 채취, 김씨의 목과 손톱 등에서 채취한 DNA와 함께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긴급 감정을 의뢰했다. 이씨가 김씨를 살해한 범인이라면, 김씨의 손톱에서 나온 DNA는 이씨의 DNA일 가능성이 높았다.

오후 7시쯤, 김씨 집에 대한 현장감식이 다시 이뤄졌다. 김씨 집 부엌에는 소주병 2개와 음료수병 2개가 놓여 있었다. 아들의 증언에 따르면 김씨는 평소 술을 거의 마시지 못했다.

안방 쓰레기통에서는 영수증 한 장이 발견됐다. “이씨가 김씨 집에 있었다는 결정적인 증거였다”고 검시팀은 말했다. 3월 26일자 마트 영수증에는 유명 화장품 브랜드 이름이 찍혀 있었고, 해당 화장품은 안방 안에 포장이 뜯어진 채 놓여 있었다. 영수증에 찍힌 카드 결제자는 김씨가 아닌 해수욕장에서 발견된 남성 이씨였다. 적어도 화장품을 구매한 26일과 두 사람 모두 사망한 채 발견된 28일 사이, 이씨가 이 집에 있었다는 확실한 증거였다.

검시팀과 수사팀이 밝힌 사건의 전모는 대략 이랬다. 이씨와 김씨는 약 6개월 전부터 사귀고 있었다. 사건 발생 하루 전인 27일 김씨는 식당 일을 마치고 오후 11시쯤 집에 도착했다. 오후 11시30분쯤 비닐봉지로 추정되는 검은 물체를 든 이씨가 김씨 집으로 향했다. 범행은 그때부터 28일 오전 3시 사이에 발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씨는 김씨 집 안방 침대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김씨의 목을 양손으로 눌러 살해하고, 작은방에 들어가 커튼 끈과 전선으로 두 번의 자살 시도를 했다. 토사물과 떨어진 단추는 그 흔적이었다.

자살에 실패한 이씨는 오전 4시쯤 본인의 집에 들러 휴대폰을 놔둔 후, 오전 6시쯤까지 피해자의 집 근처를 술에 취해 배회했다. 이후 이씨는 택시를 잡아 타고 해수욕장에 도착, 스스로 목을 맸다.

며칠 뒤 도착한 국과수 감정과 김씨 부검 결과, 김씨의 시신에서는 이씨의 DNA가 다량 발견됐다. 정확한 사인은 손으로 목이 졸린 경부압박질식사로 확인됐다. 사건 담당 경찰서는 지난해 5월 31일, 해당 사건 조사를 마치고 ‘불기소(공소권 없음)’ 의견으로 검찰에 넘겼다. 피의자와 피해자가 모두 사망한 사건, 책임을 물을 곳이 없었다.

글ㆍ사진=곽주현 기자 zooh@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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