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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진의 삶이 있는 풍경] 호떡 굽는 구도자

입력
2017.02.28 1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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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이익, 치이이~익.”

잔뜩 기름을 먹은 검정색 불판 위에 연달아 호떡반죽 몇 덩이가 얹혀졌다. 물컹거리던 반죽은 주인 아주머니의 손을 타고 앞뒤로 뒤집어지면서 이내 ‘때깔’ 좋은 구릿빛으로 익어갔다. 그까짓 호떡쯤 별것인가 하겠지만 이 집 호떡은 정말 맛이 좋다. 오후 다섯 시가 넘어가는 시간. 배가 출출해지는 즈음이다. 주인 아주머니의 손길이 조금 분주해졌다. 좋은 거래처를 만난 덕에 맛있는 순대를 공급 받을 뿐이라며 손사레를 하지만 분명 주인장의 손맛이 추가되었을 순대도 입맛을 쪽쪽 다시게 한다.

곧 이어 손님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호떡 하나만 달라는 사람, 호떡만 주문했다가 아쉬운 맘에 추가로 순대 1인분을 주문하는 사람, 호떡 세 개와 떡볶이를 주문하더니 배달까지 해달라는 옆 미용실 점원 그리고 어설픈 한국어로 음식을 시키고는 주문에 성공했다는 표정으로 환하게 웃는 중국인 여성관광객들까지. 주인아주머니가 덤으로 내주는 꼬치오뎅과 따끈한 국물이 함께 뒤섞이고 좁은 분식집 안은 들고나는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손님들의 성향도 제각각이다. 가만히 앉아 말없이 먹기만 하는 사람, 혼자 와서 주인아주머니와 시시콜콜 얘기를 주고받는 사람, 아들의 근황을 물으며 선을 보게 해주겠다는 늙수그레한 동네 목사님 등등. 어째 주인과 손님이라기보다는 동네이웃들끼리 주고받는 정겨운 풍경이나 다름이 없다. 두 평짜리 분식집 안의 공기는 훈훈하게 데워졌다.

사실 이런 따사로운 풍경의 진원지는 음식이 아니라 바로 주인장인 이민옥(59)씨의 늘 웃는 얼굴에서 나온다. 허기를 채우려 잠시 머물다 가기 마련인 이들에게 주인장의 손길과 눈길은 한결같이 따사롭다. 항상 웃으면서 먼저 말을 건네고 자리가 불편한 것은 없는지 묻는다. 손님을 끌기 위한 억지웃음이 아닌 사람을 살필 줄 아는 본성에서 나온 특유의 미소가 이곳 주인장에게 있다. 주인은 맛이 먼저라고 하지만 이 곳의 장점은 손님의 마음을 챙겨주는 것에 더 있다.

전라북도 순창이 고향인 이민옥씨의 어릴 적 꿈은 음악교사였다. 가난한 집에 태어나 정식으로 음악을 배울 수는 없었지만 벽지에 피아노건반을 그려놓고 ‘뚱땅’거리거나 동네아이들 모아 노래를 가르쳐주던 추억을 아직도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아쉽게도 꿈과는 달리 이씨는 경제력 없이 술만 들이키는 남편을 대신해 일찍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다. 주방보조로 접시를 닦는 일부터 시작해 이른 아침부터 늦은 새벽까지 몸이 부서져라 일을 했다. 2005년 처음 남산 중국영사관 앞에서 손수레에 호떡불판을 싣고 노점을 시작했는데 단속반에 걸려 가슴 두근거리며 피해 다녔던 순간들이 가장 고달픈 기억으로 남아있단다. 큰아들과 지적 장애를 지닌 딸을 생각하며 하루하루 버티던 시간들이었다. ‘술만 먹으면 난리를 쳤다’는 남편에 대한 원망도 6년 전에 알코올 중독에 의한 뇌졸중으로 쓰러진 후 뒷바라지를 하면서 오히려 아끼는 마음이 더 생겼다고 한다. 이 모든 얘기들은 여전히 그녀의 웃음에 실려 들려왔다. 자신의 생을 통해 삶을 성찰해 가는 모습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호떡 굽는 구도자의 느낌이랄까.

이민옥씨는 비바람을 견뎌야 했던 노점에서 벗어나 5년 전 지금의 자리에 터를 내렸다. 일정한 수입이 생기고 한결 마음의 안정을 찾으면서 자신의 가게를 찾는 손님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늘 웃게 된다고 말했다. 그녀의 말마따나 “이곳에서 사람을 만나서 얘기 나누는 게 너무 좋다”고 하니 배가 출출할 때면 한번쯤 들러 주인장과 안면을 터도 좋을 듯싶다. 서울 충무로 대한극장 오른쪽 골목에 있는 ‘엘림분식’, 이민옥씨가 웃음으로 사람을 맞이하는 곳이다.

임종진 달팽이사진골방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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