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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현의 유행어 사전] 아재

입력
2016.09.06 15: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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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의 사투리 혹은 낮춤말인데, 요즘은 중년 남성을 긍정적으로 부를 때 쓰인다. 아재의 반대말은 개저씨다. 젊은 세대의 사회문화적 표상에 의하면, 아저씨는 ‘난닝구’를 입고 샌들에 발가락 양말을 신고 거리를 활보하는 중년 남성이다. 젊은 여성 입장에서 개저씨의 SNS 연관어는 ‘성희롱ㆍ성추행’인데, 개저씨 눈빛 퇴치법은 “똑바로 응시하고 똑같이 몸을 훑어준다"이다. 이에 반해, 아재는 귀엽고 친근하다는 느낌이 강조되어 있다.

중세 국어에서 ‘앗ㆍ앚ㆍ앛’ 등은 때가 이르거나 때가 무르익지 못한 사태를 가리켰다. 이 어근은 ‘아사달’ ‘아침’ ‘아우’와 같은 단어에 들어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어원상 아저씨(앚 + 압[父] + 씨)는 아버지와 항렬이 같지만 아버지보다 나이가 어린 사람, 즉 작은아버지를 가리킨다.

아저씨는 한자어로 숙(叔)이다. 고대 중국에서 아버지 형제 중에서 맏이는 백(伯) 혹은 맹(孟), 가운데는 중(仲), 어린 쪽은 숙, 더 어린 쪽은 계(季)라고 불렀다. 성인 남성의 위계질서에 관한 이런 호칭법은 친족뿐만이 아니라 부족 및 고대 국가 전반에도 적용되었다. 백중지세(伯仲之勢)는 누구를 형이라 아우라 하기 어렵다는 뜻이며, 추석은 다른 말로 중추절(仲秋節)이라고 한다.

중년은 예전에는 대개 마흔 안팎을 가리켰지만, 오늘날에는 고령화 및 청년 실업으로 인해서 상당히 달라졌다. 통계적으로 2015년 한국 인구의 중위 연령은 41세인데, 1980년에는 21세였다. 청년 지원 관련법에서는 15~29세가 청년이며, 고용부는 39세까지도 청년으로 간주하고 농어촌 등에서는 49세 이하도 청년이다.

연예인 및 방송인을 기준으로 말한다면, 아재의 하한은 배우 조진웅과 셰프 오세득(둘 다 1976년생)이며, 상한은 앵커 손석희(1956년생) 정도다. 물론, 당연히 60대도 아재로 불리는 경우가 없지 않으며, ‘초딩이’ 입장에서는 20대도 아재다.

아저씨를 대신해서 아재란 말이 유행하게 된 것은 무엇보다 후자가 2음절이고 사투리이기 때문인 듯하다. 젊은 세대는 음절 수가 적은 말을 선호하는 데다가 공식 표준어 어휘인 아저씨란 말로는 함축하기 어려운 새로운 사회문화적 의미를 ‘아재’에 담아내려고 한 것이다.

만40세인 1976년생은 ‘서태지와 아이들’이 등장한 1992년과 IMF 외환위기가 터진 1998년에 각기 만16세와 만22세였다. 만50세인 1966년생은 그때 각기 만26세와 32세였다. 오늘날의 40대 ‘아재’들은 1990년대 들어서 본격적으로 개화한 대중소비문화를 만끽한 첫 세대이며, 청년 시절에는 취업의 어려움을 겪은 세대다. 반면에 50대 중후반 이후의 ‘꼰대’ 세대들은 정치적으로는 급진적이지만 문화적으로는 보수적이며, 열심히 화염병을 던지다가도 졸업 후 대기업에 취직할 수 있었다.

아저씨를 아재로 만들어 주는 것 중의 하나가 ‘아재 개그’다.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중학교는?”(로딩중). “새우랑 고래가 싸우면 누가 이기게?”(새우는 깡이 있고 고래는 밥이야) 등과 같이 썰렁한 언어유희가 대부분이지만, 아재 개그는 세월호와 가습기 살균제 이후에 즐겁고 좋은 일이 드문 요즘에 은근한 중독성을 갖는다. 아재 개그가 ‘부장 개그’와 다른 점은 그 앞에서 억지로 웃어주지 않아도 되며, 심지어 면박을 줄 수도 있다는 점이다.

아저씨와 아재의 다른 차이는 아재가 멋지고 매력적인 중년 남성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아재는 외모와 패션에 신경을 많이 쓰며 그런 만큼 촌스럽기는커녕 오히려 매력적이다. 옷에 몸을 맞추면 아저씨지만 아재는 스스로의 취향과 안목에 따라서 옷을 고른다. 오늘날 아재 세대의 세련된 문화적 소비는 젊은 시절부터 익숙했던 대중소비문화와 관련이 깊다.

아재 개그는 돈이 안 들지만, 매력적인 아재가 되기 위해서는 시간과 돈을 많이 써야 한다. 이런 점에서 아재에는 세대 변수가 기본이기는 하지만 슬쩍 계급 변수가 묻어 들어가 있는 것이다. 아무튼, 아재는 아저씨 특유의 권위주의를 스스로 타파하고 적극적으로 세대 간의 소통을 지향한다. 민주주의가 일상적, 문화적으로 체질화된 첫 번째 세대인 것이다.

이재현 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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